하루
몸이 탈색이 되도록 이야기하고 나눈다. 이야기도, 지난 만남를 더듬자 지금이 옛일 같다. Y친구들, 활동가들과 고민도 섞지 못해, 만남도 별반 다르고 진한 것이 없어 미안하다. 금요일은 약속이 겹쳐있고, 미리 나눈 얘기들로 가볍다. 하지만 마음의 잔상이나 몸은 이물감을 느끼는 듯 편치 않다. 마음들이 몇 순배돌고,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피곤한 몸은 신호를 보낸다. 소주에서 맥주로 바꾸는 순간 느티나무길 골목의 바람이 졸았나보다. 하루의 끝은 바램보다도 사람들의 만남에 밀려가버린 듯하다.

이틀
밀려난 몸이 일찍 깨어났다. 머리의 취기는 아직 있는 듯한데 어제 읽던 책의 여운이 찌릿하게 다시 온다. 책을 집어든다. 읽어낸다. 절망도 희망도 버티어내는 지금에서 주춤거린다. 마음이 놀라다. 평론가의 글을 보지 않을까 하다 그만 본다. 평론의 몫을 해낸듯 비평의 시선이 은근히 들어온다. 그렇게 한때가 지난다. 식구들과 새로생긴 큰길식당에 가서 묶은 요기를 하듯 정신없이 몸을 채운다. 식구들이 무슨 아픔과 일의 무게가 버티고 있는지 가늠한다. 청소를 하지 않은 막내 방에서 책을 다시 권한다. 그렇게 책을 껍질을 벗고 저녁이 밀려온다. 밤이 밀려오는 주막에서 어스름을 맞아 막걸리를 나눈다. 만나는 이들을 건네고, 모임의 마음을 잔에 기울여 보낸다. 또 만날 이들을 이야기하고, 건네고 싶은 속내를 펼쳐본다. 미루나무가 있는 한희원의 그림을 기억하다보니 잎이 반짝거린다. 바람이 까르르 웃으며 밤 뒤로 숨는다. 허리 춤에 느낌을 차고, 많이 숨이 죽은 분위기를 차고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넘는다. 벗의 문자로 꼬리에 채였다. 호기를 가장해 치킨에 맥주를 시켜 웃음과 애정을 섞는다. 아이들은 맛만보고 음식을 물린다. 아까워 한점 더 베어 문다.

사흘
끝이 나지 않는 다른 책의 중동을 물었다. 물다보니 아린 즙이 배여나왔다. 끌려간 위안부만이 아니라 150만의 노동자라. 절반도 되지 않는 월급에다 반강제 삶을 살게 한 이들의 배후가 버티고 서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 여운이 채 식기도 전에 전해오는 책의 말씀은 버겁다. 졸음에 피곤도 책장도 찰랑이게 놓고 싶다. 바람에 쓸려가도록 깜박 졸음에 잊고 싶다. 어제 언덕 넘어오다 만난 문자가 걸린다. 다시 연락이 와 어디서 보자고 한다. 버스 안에서 더 책 속에 파묻히다보니 깜박 정거장을 지나친 듯 싶다. 내려보니 한 정류장 먼저 내렸다. 흐린 하늘 속 찬찬히 걷다. 익숙한 골목과 식당들 선화동을 거닐다가보니 약속한 곳. 쉬는 날이다.
자전거를 타고 온 이와 자리를 옮긴다. 어제 봤다는 한무리의 중후년 양반들이 친구를 반갑게 맞는다. 민작분들이라는 소개다. 밤을 꼴닥새우고 이야기나누다 헤어지는 길이란다. 김*기 시강좌가 생각나 건넨다. 마음을 섞고 부여잡고 시린 속을 달랜 이들의 지난 밤이 읽히는 듯싶다. 벗이 묻는다. 작정을 한 듯 말이다. 어제도 그제도 다른 친구에게 물어봤던 말이다. 나는 없다고, 나에 기댄 학문도 그러하다고 한다. 어렵다고 한다. 한 시인이 말한 질량과 공간도 어려웠다고 한다. 몸말을 듣고 싶은 듯하여 이것 저것 게워낸다. 어떻게 살고 싶은데. 가깝다고 한다. 좋은 삶은, 서사적인 나도, 너-나도 족쇄에 풀려났다고 말한다. 벗은 자꾸 그말이 꿈에 가깝다고 했다. 너의 꿈이 뭐냐고 반복하여 말한다. 그러다가 어제 물러난 어둠이 흐린날 주점에 다시 찾아온다. 사흘의 이야기를 불러 앉히고 꾸짖는다. 기억이 어둠에 잡아먹혔다. 어둠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주섬주섬 챙겨 도시를 빠져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