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구에 착수한 것은 세기 전환기 이탈리아에서 번성한 저항의 장소들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유용한 민주주의 개념을 정교하게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였다. 상조회와 협동조합, 민중회관, 지방자치체의 실상을 관찰하면서, 민주화 과정의 특정한 순간에 내포된 정치적 논리를 발굴함으로써 민주주의 이론의 규범적 핵심을 연마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과거에 적합했던 전략이 오늘날에도 곧바로 적용될 수 있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과거는 미래를 위한 공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현재를 위한 준거점을 제시할 뿐이다. 14
나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저항 공간들을 연구하면서 공간이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이행기 동안에 좌파 담론에는 상당히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농민적인 천년왕국설 및 소부르주아적인 급진주의와 불편하게 공존했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동맹체들을 하나로 접속시킨 것은 공유된 언어가 아니라 공유된 사회 공간이었다. ...협동조합과 민중회관(민중의집), 노동회의소가 실상 공간이 아니라 결사 association라는 것이다. 결사에 의해 창출되지 않는 공간도 있고, 목적이 없는 공간도 있다. 여기에서 연구하는 정치 공간은 결사를 통해 형성된 공간으로서, 결사와 공간이 중첩되어 있는 범주에 속한다...이렇게 공간과 결사의 차이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9
때때로 주변화되거나 패배한 실천에도 해방의 실천이 남긴 흔적들이 있다. 진화의 논리나 목적을 배제하고서 역사를 본다면, 승리뿐 아니라 패배도 미래의 투쟁을 비춰 주고 인도할 수 있는 '성찰의 힘'을 줄 수 있다. 벤야민은 [역사철학에 대한 네 번째 테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에게 실재하는 모든 계급투쟁은 투박한 물질적 사물들을 둘러싼 투쟁인데,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섬세하고 정신적인 것들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계급투쟁에서 정신적인 것들은 승자의 수중에 떨어진 전리품의 형태와 다른 모습을 띤다. 이 투쟁에서 정신적인 것들은 용기와 유머, 간계, 불굴의 투지로 나타난다."
문제는 역사에 대항기억을 주는 것이다 -푸코-
다산 정약용 선생은 계에 대해 세 가지 설명을 하고 있다. " 계는 회이고, 계는 약이며, 계는 합이다"
1. 두레는 순우리말 '두르다'에서 나왔다. 우리는 보통 "둥그렇게 원을 두르다","성곽을 두르다"에서처럼 '두르다'하면 원이나 성곽을 연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이나 성곽 자체가 아니라 원이나 성곽을 두르는 이유이고, 원이나 성곽을 두른 이후의 결과다. -두른 뒤의 결속력은 강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친근한 우애에 기초하게 된다. 결사체를 만드는 것은 구성원 간의 우애와 결속력을 얻기 위해서다.
2.두레의 또 다른 어원으로 '둘레'가 있다. 둘레는 '돌아간다', '돈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순환을 의미한다.
3. 두레의 세 번째 어원인 '두루'다. 두루란 "두루두루 행복해라"라는 설날에 듣는 덕담에서 보듯, 모든 구석구석마다 빠짐없이 골고루 또 널리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계는 합이다의 합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합일이다. 두레는 일종의 재분배 시스템이며, 이를 통해 두레의 구성원은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두레는 제사이자 놀이, 그리고 노동이다. 36-46
생협 안에는 세 님이 있다. '존재하는 님', '의식하는 님', '연대하는 님'이 그것이다. '존재하는 님'은 아직은 생협의 조합원은 아니지만 언제라도 생협의 조합원일 수 있는 지역의 주민이고, 생협의 다른 님들을 향해야 할 지향이다. '의식하는 님'은 생협의 조합원이면서 생협의 사업과 활동을 지탱시켜주는 사람들이다. '연대하는 님'은 생협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서 생협의 생협이게끔 드러내는 역할의 담당자다....우리는 '존재한 님'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설정을 해야 한다. '의식하는 님'과 함께하는 '연대하는 님'의 활동이 '존재하는 님'에게로 향하게 해야 하고, 이를 통해 협동조합이라는 조합원의 사적 영역을 지역의 공적 영역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생협운동의 주체는, 조합원을 포함해서 시장경제와 상품경제로부터 내몰린 지역의 님들까지를 포괄한다. 229-230
협동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인식 전환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제까지의 생협과 앞으로의 생협, '존재하는 님'과 '의식하는 님'과 '연대하는 님', 생협을 생협답게 하는 조합원 활동과 생협을 유지시키는 직원 노동 사이의 관계를, 서로가 서로를 포태하고 서로가 서로를 먹이고 되먹이는 관계로 맺게 할 수 있다. 협동은 수평적 균형이 아니다. 협동은 거래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이다. 233
새로운 노동의 가치와 기술
그림자 노동이후 일리히는 사용가치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표현으로 환경의 '유용화 가치 utilization values'라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한다. 이것은 시장과 관료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만 환경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상품가치가 상품을 얻는 get 행위고, 사용가치가 스스로 하는 do 행위라면, 유용화 가치는 생태적 환경의 유용성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하는 행위다. 상품가치의 노동이 보다 많은 상품을 얻기 위한 노동이라면, 사용가치의 노동은 스스로의 삶을 일구어가는 노동이고, 환경 유용화 가치의 노동은 생명의 창조걱 진화를 기르는 노동인 것이다. 240
기술을 민중의 손 안으로 되돌리는 것을 일리히는 '컨비비얼리티를 위한 도구'로 설명한다. '컨비비얼리티'는 영어로 '연회' 혹은 '연회장에서 조금 술에 취한 기분 좋은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일리히의 컨비비얼리티는 영어에서가 아닌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페인어세서의 그것은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온 역사적 결속, 자신의 공유지를 지켜올 수 있게 했던 마을 사람들의 결속"이다...자율적인 공동노동이고 자립적인 공생관계이며 나아가 공동의 유희행위인 것이다. 241
나는 일리히의 버내큘러를 우리말 '울력'으로 전환시킬 것을 제안한다. 울력은 두레에서의 노동이면서 동시에 선불교에서 스님들이 수행의 일환으로 삼는 노동이다. 고려시대 지눌 스님은 불자가 행해야 할 세가지 일로 예불하고, 경 읽고, 울력하는 것이라 했다. 울력의 '울'은 모두를 나타내는 '우리'와 그 모두가 함께 하는 조직으로서의 '울타리'에서 나온 말이다. 울력의 '력'은 힘이다. 따라서 울력은 '한 울타리 안에서 모두가 제 나름의 힘씀을 모아 모든 생명을 더욱 이롭게 하는 것'이다. 246
결사체
사회학자 사토에 의하면, 결사체는 사회 구성의 기본 개념으로서 공동체와는 대치되는 개념이다. 공동체가 일정한 지역 공간에서 개인이나 가족이 그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가족과 상호 연대하는 행동인 반면, 결사체는 이런 공동체 위에서 목적 기능별로 형성된 것이다. 결사체에는 국가, 정부, 정당, 의회, 행정기관, 학교, 병원, 교통기관, 회사, 레크레이션 시설, 노동조합, 협동조합, NPO 등 매우 다양한 유형이 존재하지만,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결사체는 자발적 결사체이다. 여기서 자발적이라 함은 가족이나 친족의 구성원인 한은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법률이나 사회 규범에 따라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이익과 이윤이나 생계를 목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가족 국가 시장의 제약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의지에 따라 결성한 결사체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자발적 결사체는, '자발적이고 자립한 개개인 간의 연합에 의해 성립하는 네트워크형의 결합체'라 할 수 있다. 251
결사체란 한마디로 '자립한 개개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이다. 따라서 '결사체에 의한 노동의 조직'이란 자유롭고 평등한 개개인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해서, 자본에 의해 통제받지 않고, 협의를 통해 각자의 노동을 조직해가는 것을 의미한다.253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의 구별
사회적 기업과 전통적 협동조합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은 모두 사회적 목적과 경제적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업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협동조합이 그 '조합원'의 공통된 필요와 염원을 충족하기 위한 사업체인데 비해, 사회적 기업은 '지역사회'의 필요와 염원을 충족하기 위한 사업체이고, 때문에 협동조합은 조합원 간의 내부적 연대, 조합원을 향한 이윤 분배, 조합원의 주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반면, 사회적 기업은 지역의 다양한 관계자 연대, 지역을 향한 이윤 분배, 관계자 전체의 주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264
볕뉘.
1. 저자들이 결사를 논해 반갑다. 앞의 저자는 공간에 붙어있던 맥락과 이면에 천착하고 러시아혁명이후로 안타깝게도 결사에 대한 논의가 없던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 한차례 민중의 집에 대한 논의와 진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결사(모임)에 대한 논의로 번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우리 역사에도 무수한 결사의 시도와 저항의 응어리들이 산재해 있다. 혼자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모임, 결사, 숱한 흔적들이 정교해지지 않으면, 대안의 회계가 있지 않으면, 공간의 거처를 마련하려는 의식하는 노력이 없다면, 가치가 다른 이들일 수록 같은 거처에 밥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품어본다. 사유의 거처, 활동의 거처...어쩌면 아무 것도 품을 줄 모르거나 품지 못하는 습속을 가진 것이 우리의 수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 두레생협의 윗글들은 소화시키기가 힘들다. 말이 쉬움에도 밀도가 몹시 떨어진다. 일단 모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