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스메 소세키는 런던 유럽생활을 2년반동안 했다. 창문으로 꽉 막힌 런던의 건축물은 끊임없이 남들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의심을 들게했다. 툇마루도 바람도 없는 이질적인 시공간은 늘 그를 불안에 떨게했다. 바다에 어린시절을 보낸 친구가 도시에 와서 이유도 모르고 시름시름 파김치가 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몸이 앓고 있는 것은 따듯한 바람일 수도 햇살일 수도, 아니면 품에 그리던 바다에 대한 갈증을 채우지 못하는 우울일지 모른다고 한 친구가 말한다. 일본인에게 서양의 관문은 그렇게 낯설뿐만 아니라 병적이다. 도대체 맞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서양의 것을 몸으로 뱉어내기도 하는 그가 서구의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주장했다. 어쩌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툇마루와 익숙한 풍경 속에서 치유되는 과정으로 도련님이란 작품을 써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는 아니지만 어정쩡한 돌출의 인물인 주인공들에게 파편적으로 그 주의를 입혔 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 졌다. 그리고 옛 일본의 향수인 기요를 그리워하며 작품을 끝내고 있기도 하다.

 

 

 

 

 

 

 

 

 

 

 

 

 

 

 

2. 불편


우리는 소비와 음식맛의 분류와 구분에 지나치게 익숙해있는지도 모른다. 요구와 욕망은 맞아떨어지고, 또 다른 도락의 유토피아는 가까이 있고 주문할 수 있다. 과노동과 과응대에 허덕이는 우리의 일상은 언제 어디든지 부릴 노예가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겐 아직도 식당문화가 익숙하지 않다. 무엇을 더 시킨다는 것에 종업원의 불편에 대한 앙금이 있기때문이다.  작년 KTX열차의 한 여승객은 열차직원을 두고 서비스는 물론 고객에 대한 기본 응대가 어쩌느니 하면서 한시간 내내 통째로 전세낸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힘들면 힘들다고 악소리를 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지르는 것이 맞다. 그 고객을 보면서  어디서 뺨맞고 어디와서 화낸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화가 나더라도 표정과 속내는 절대보이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매뉴얼에 나오는대로 고객응대를 하라는, 그 감정노동의 양과 질은 일상에서 또 다른 출구를 찾는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는 있긴 있는 것 같다. 맛의 유토피아가 있는 맛집에서는 온갖 불편을 감수하지만, 외식과 회식에서는 무릎을 꿇고 복장을 단정히 하면 솔의 톤으로 고객의 눈빛을 보고 어쩌구 감정의 호사를 누리려는 무의식이 내장되어 버린다.

 

3. 좀더 불편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터에서  과노동과 과응대에 덜 시달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노동과 응대에 덜 주눅들어 돌아왔으면 한다.  그러다보면 그러다보면 가족 공간은 그렇게 쌓인 긴장을 자식을 위한다는 스트레스해소가 반쯤 섞여있는 밥상머리 교육도 줄어들지는 않을까 싶다. 더 더욱 중요한 것은 다 같이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정치가 경제를 왜곡시키지 말고 굵직굵직한 물꼬만 트게 만들더라도 이런 변태같은 일과 증상이 현저히 줄 수 있다.

 

4. 신은 죽고, 신에 의탁해 생긴 유토피아는 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그 사라져버린 시공간에 낭만적 사랑이라는 은신처를 제공한다. 상품을 모시고 로망을 내장하고 아무도 없는 둘만의 유토피아를 갈구하게 한다. 사랑은 불편하지 않다. 계급적인 제약과 어떤 힘든 노역도 어떤 핍박도 낭만적인 유토피아란 찰나의 환상은 현실의 고단을  지워버린다. 자본주의의 진화와 도피처의 제공은 점점 교묘해지고 양가의 모습으로 자라난다.  이름도 색깔도 끝이없는 명품의 행렬, 향수, 양주, 포도주, 다이아몬드, 여행... ...

 

5. 이 모든 불편한 생각을 한계효용으로 치환해서 이야기하면  위의 얘기를 다 지워버릴 수 있다. 모든 것은 휘발한다. 불편을 감수하고 더 좋은 곳, 좋은 것에 더 호사를 누린다는데 무슨 말이라구.  나를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너를 건네고 있는 중이다.  내뿜는 매연으로 도로는 점점 혼탁해지고, 짜증과 과도한 요구로 강물은 점점 먹을 수 없게 되고, 여유하나 없는 일상은 폭염지수가 점점 더 올라가 비지땀이 비질비질나는 지경에 다다른다. 여기저기 짜증도 곤란함도 끓기  직전은 아닌가? 

 

6. 불손

 

금전에 대한 감수성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교사인 집은 부부교사를 비교하고 부부교사인 집은 의사를 비교하고, 의사인 집안은 사업을 하는 집을 비교하고...하루하루가 부족한 것 투성인 것은 아닐까...돈을 많이 모은 사업주는 죽어서도 가지고 가지 못할 정도로 쌓아두기만 하는 비참의 순환고리때문에 허걱거리는 것은 아닌가? 교사인 집안, 공무원, 군인들을 보는 시민들은 그들의 정년과 연금을 본다. 우리 강남 사람은 옆집 앞집 윗집의 살림살이만 보인다.  그렇게 집값,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팍팍해 푸어의 우리집 살림만 커보일 뿐, 비정규직과 계약직, 그날벌어 그날을 사는 이들의 금전에 대한 헤아림도 감수성도 없다. 10만원 100만원에 대한 일상과 삶의 다른 강도와 충격을 헤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불문율이 이렇게 심한 사회가 있을까? 아마 지금여기의 불평등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이 이렇게 우리가 서로 보듬으려는 공유문화자본이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똑 같은 모듬끼리 300만원되는 과외를 시키지 못하면, 100만원 되는 과외, 30만원되는 과외라도 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추락하듯 삶은 인질처럼 저당잡혀있다.  낮은 곳에 임하지 않더라도 차상위계층이나 소득분위...우리의 살림살이와 금전관계에 대한 실감을 회복하기만 해도 어쩌면 우리는 제대로 아파할 수 있을지 모른다.

 

7. 금전과 살림살이에 대한 헤아림과 나눔, 그 시도조차 없는 어색함, 생까기를 비롯해서 그 습속이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게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스메 소세키의 작품들 사이에는 금전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나의 개인주의] 말미 추천도서 가운데 하나는 작품들 사이 금전에 대해 다룬 부분들을 모아서 따로 분석, 비평을 해둔 것이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명예가 있다고 해서 돈도 따라 절로 들어온 경우가 흔치 않은 것 같다. 러셀도 책을 출간해서 간신히 풀칠해서 사는 경우도 허다했고, 작가들의 생활도 빈궁하기 이를 데 없기도 하다. 자본주의 속, 금전에 대한 사고와 개방, 논의의 감금의 상자에서 꺼내야 그래도 일상의 민주주의를 조금이라도 현실감있게 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볕뉘.

 

-1. 도련님과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들, 나스메 소세키의 책으로 동아시아 세미나가 이어진다. 나스메 소세키는 작품 속의 빨간셔츠처럼 서구가 합리적으로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싫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서구의 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자기 개성의 발전을 완수하고자 생각한다면 동시에 타인의 개성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 둘째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거기에 수반하는 의무 사항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 세째 자기의 금력을 나타내려 한다면 거기에 수반하는 책임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 이 세가지 사항으로 귀착됩니다. 64 [나의 개인주의]

 

여기에 비한다면 지금여기의 위세가들은 권력도, 명예도, 돈도 모두 움켜쥐려하는 말종의 인간들의 군상만 남겨둔 것 같다. 귀족으로서 품위도 가져오지 못했고, 명예말고 돈을 가지려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권력을 얻으려는 것은 하물며 말할 필요도 없다.  식민지 하수인 근성만 뭍어 있는 것은 아닐까?

 

-2.  한 선배는 최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는 곳 얘기를 건넨다.  시간을 늘려야만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식품공장 노동일로 늦게 와 말을 나눈다. 세상과 편안한 일상들과 낯설은 이물감들이 마음에 남는다.  자리를 옮기며 서비스 얘기며 다음날 후원달리기에 다녀온 뒤 전날의 일들을 더 나눈다.

 

-3.  오고가는 길, 책을 한보따리 들고 짬짬이 보고 생각한다. 떨어져 있는 아쉬움만 아니라 현실 속에 감각과 감정으로 부여잡고 밀고 나갈 수 없음이 밟힌다. 이렇게라도 마음의 언저리라도 건드리는 수밖에... ...

 

-4. 위의 흔적엔 다른 벗들의 경험담이 조금씩 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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