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과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2.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3.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만감을 맛본다. 하지만 입을 열려고 하니 동시에 공허를 느끼게 된다. 지난날의 생명은 이미 죽어 없어졌다. 나는 죽은 생명에 대해 극도의 만족감을 맛본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을 통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 버린 생명은 어느덧 썩어 문드러졌다. 나는 썩어 문드러진 생명에서도 충만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으로도 생명이 공허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흙이 땅 위에 팽개쳐져 있어도 높은 나무는 자라지 않고 들풀만이 자랄 뿐이다.

이것은 나의 죄요. 허물이다.

들풀은 뿌리가 깊지 않다. 아름다운 꽃이나 잎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들풀은 이슬을 마시고 물을 빨아 먹으며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저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들풀은 제 푸름을 자랑할 때도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베이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죽어서 영원히 썩어 갈 때까지.

그러나 나는 담담하고 기쁘다.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리라. 나 스스로 사랑하는 나의 들풀이지만, 나는 이 들풀로 장식을 하려는 지면을 증오한다. 땅속의 불덩어리는 땅 밑으로 흐르다가 솟구쳐 오른다. 일단 용암이 분출되면 땅 위의 들풀과 높은 나무도 그래서 썩어 문드러지는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리라.

그러나 나는 담담하고 기쁘다.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리라. 하늘과 땅이 이다지도 적막하기에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지도 못하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를 수도 없다. 설령 하늘과 땅이 이처럼 적막하지 않더라도 아마도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밝음과 어둠,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는 이 한 움큼의 들풀을 선사하고자 한다. 친구이든 원수이든,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나 자신을 위하여, 친구와 원수를 위하여, 인간과 짐승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나는 바란다. 이 들풀이 죽어 없어지고 썩어 문드러지기 위해서 불길이 빨리 타오르기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일찌감치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니 이는 실로 죽어 없어진다거나 썩어 문드러지는 것보다도 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떠나거라, 들풀이여! 나의 이 제사 題辭까지도.

 


 

 

볕뉘.

 

1. 이제 나는 풀을 지우련다. 낭만처럼 버티고선 김수영의 풀을 지우련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저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 제 푸르름을 자랑할 때까지도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베이기도 하는 것'이 풀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어렴붙이 가슴에 묻는다. 이 들풀로 자신의 지면에 장식하려는 이들을 경계한다. '떠나거라 들풀이여'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죽은 자들은 죽음의 통각 속에서만 생명을 느낀다. 그제서야  한 움큼의 들풀임을 깨닫는다.  늘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뀌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지키고 있고, 일하라는 말도 헛소리처럼 가슴을 울리고 있다. 그 방 속에 메아리치는 노래도 잊어버렸다. 방을 잊어버렸다. 방을 잃어버렸다.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버렸다.

 

2. 들풀로 자신을 장식하려는 자를 증오한다.  '하늘과 땅이 이다지도 적막하기에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지도 못하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를 수도 없다.'  불길이 빨리 타오르기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일찌감치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섞어 문드러지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3. 묵혀둔 김수영과 루쉰을 끄집어낸다. 다시 살펴보며 어쩌지도 못하고 처연하게 있다. 그러나 나는 담담하고 기쁘다.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죽음을 각오한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 되는 것은 아닌가.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사회는 다시 설 수 있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