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페북소식을 어둑새벽에 살피다 몇몇 영상에 아픔이 저며 눈물이 파스처럼 번진다. [백년의급진]에 이어 [프티부르조아 사회주의 선언]을 마저 읽다. 그리고 지난 모임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을 곁에두고 등잔밑처럼 너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언론매체는 물론이며 지식인들은 하물며... 발간한 출판사가 고맙기 그지없다. 페친(이종태)이 언급한 후기는 공감하지 못하겠다. 원하는 건 논란이고 이 나라와 대유의 꼭지이다. 역사는 이편 저편이 아니라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말이 박히는 아침이다. 아- 출근해야지!  06:59 

 

 

 

 

 

 

 

 

 

 

 

 

 

 

 

 

 

 

 

 

 

볕뉘. 

 

1. 다른 생각, 다른 사유, 다른 사상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라는 것은 있는가? 사건과 행위는 이미 벌어지고 그 관성을 가지고 뒤돌아보지 않고 간다. 자전거는 오토바이로, 자동차로, 브레이크없는 기차로 폭주한다.  과거를 삼키기 이전, 과거를 재대로 소화시키기 이전에도 동일반복의 행위와 사건은 저질러진다.  제도와 시스템이라는 기관차는 그저 질주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죽고, 또 다시 태어나고 살아간다. 세상을 눈치채기도 이전에 또 다시 삶은 명멸한다. 세상에 손내밀자 동지들은 어느새 시대의 배를 바꿔탄다.  그렇게 권력과 명예의 단내를 빨다가 죽는다. 세상의 아픔을 얻은 이는 속울음을 삼키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밑거름이 된다. 사람은 죽고 사회와 세상은 여전히 제갈길을 간다. 역사 속에 동일반복의 정황과 세상의 판이 벌어져도 거스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역사는 아군과 적군으로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우고 편리한 사유만 노예처럼 끌고 간다.  사건은 벌어지고 행위는 늘 있어도 남과 나과 구별도 되지 않고, 아와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데도 제 볼 것만 보려한다.

 

2. 백년 전에 멈춰 안중근의 시선으로 보거나, 여물지 않는 여러 상황으로 묻혀버린 시선으로 지금을 다시 보거나, 일본 지식인들이 고민했던 헌법이나 근대를 벗어나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세상은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  지금을 보는 시선을 달리한다고 전혀 밑질 것이 없는 장사는 아닐까? 지금을 보는 시선은 일본 제국주의, 수교이전의 중국, 소련의 붕괴이후 중국식 자본주의라는 관점이나, 일본의 정체에 대한 재고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3. 마르크스와 싸우고 논쟁하던 프루동의 시선으로 그 이후를 다시보고, 멕시코 프레다칼로의 집근처에서 암살을 당한 트로츠키의 시선으로 다시보고, 중국의 루쉰의 시선으로 지금을 복기한다고 해서, 알량한 살림살이와 시스템은 그리 변한게 없으므로 그 사유의 물꼬는 다시 터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4. 안중근이 함께 한 일본 지식인들의 명멸과 고민은 또 어떠한가? 서구에서 틀만 들여와 미치는 파장과 고민조차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굴욕의 사건]과 [근대의 초극]의 문제제기는 또 어떠한가?

 

5. 시대를 읽어내는 것은 또 다른 스토리와 시선을 필요로 한다. 논리와 정합성,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폄훼하거나 없앨 필요는 없다. 그 고민의 지점, 무엇을 보려하는지, 지식인들 사이의 호흡은 어떤 것인지? 현실을 바꾸어 내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세계자본주의에 대응해서 어떤 점이 다른지? 다른 시스템이나 제도, 운동을 지금 여기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인지?

 

6. 저기와 거기의 사유가 그저 외래의 이론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해내는 것이라면, 또 다른 상황에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면... ...

 

7. 주말을 낀 책 여행에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스며든다. 딱히 뚜렷이 잡히는 것이 없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보고 싶다는 미련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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