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알랑쇠처럼 나서지 말아야 할 자리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미는 건방진 자도 있고, 산미치광이처럼 자기가 없으면 일본이 곤란할 것라는 듯한 상판을 어깨위에 올려놓고 있는 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빨간 셔츠처럼 포마드와 호색한의 도매상을 자처하는 자도 있고, 교육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프록코트를 입으면 바로 자신이 된다고 말하는 듯한 너구리도 있다. 다들 그 나름대로 뽐내고 있지만 끝물호박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볼모로 잡혀온 인형처럼 얌전히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107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빨간 셔츠는 어쩐지 주는 것 없이 미웠다. 한때는 친절하고 여자 같은 남자라고 고쳐 생각했지만, 그게 친절도 뭐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더욱 싫어졌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끈질기게 설득한다 해도, 당당한 교감의 방식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하려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언변이 좋은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끽소리 못하는 사람이 꼭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표면적으로는 빨간 셔츠의 마링 아주 타당하지만, 겉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마음속까지 끌리게 할 수는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논리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순사나 대학교수가 사람들에게 가장 호감을 사야 한다. 중학교 교감 정도의 논법에 어떻게 내 마음이 움직인단 말인가, 사람은 좋고 싫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이다.  125


잘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학생들과 같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 때 진지하게 받아들여 용서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직한 바보라고 할 것이다. 용서를 비는 것도 가짜로 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도 가짜로 용서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된다. 만약 정말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4


역사와 시대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밀려오지만, 우리의 도령들은 댕기머리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자기를 삼키는 시대의 바다, 불행의 파도가 운명이라면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순응의 인생이다. 왜냐하면 정체성이라는 것이 확립되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남에게 줄 줄만 알았지, 무엇인가를 구할 줄도, 사는 데 뭐가 필요한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련님이라는 정체성은 인생에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 그렇게 때문에 그대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179

 

도련님은 외롭다. 정직하기 때문에, 솔직하기 때문에, 관대하기 때문에, 순응하기 때문에 외롭다. 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보고, 비난받고, 무시당하고, 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 슬픈 일이면서도 망가진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백가흠 해설 가운데...

 

 

뱀발.

 

1. 어쩌면 우리시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련님으로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물정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런 틈새로 권력과 명예와 돈을 탐하는 자는 이리도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도련님 바보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찰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권력도, 명예도, 돈도 탐하지만 정작 일을 탐하고 책임을 탐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도련님의 순진이 이렇게 기우뚱한 세상을 겨우겨우 버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세상에 그런 순진은 필요없는 것 같다. 도련님들은 서로 인생에 무섯이 부족한지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탐하는 무리들의 가식을 남김없이 두들겨 패야할 것이다. 그래야만 도련님의 순수가 조금의 쓸모가 있을테니 말이다. 도련님의 때를 벗는 일, 어렵다. 하지만 해내지 않으면 세상은 그 때로 인해 조금도 바뀐게 없을테니 말이다. 그런면에서는 많은 도련님이 필요한 시대이지만... ...

 

 2. 만화책 앞쪽을 보다 본론에 들어가긴 전 책장을 덮다. 소설을 읽은 뒤 다시 본다.

 

 3. 경주 미술관 도서관 전시회를 다녀와 만화책을 마저 본다. 동시대란 세대를 같이 살아 있다가 아니라 삶과 시대의 고민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도 같다. 안중근님도 만나다. 시대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뚫고 나가는 삶의 흔적을 본다.  만화가 소설의 입체감과 배경과 맥락을 너무도 훌륭히 잡아낸다.  만화는 늘 소설 속 읽기의 상상력을 좁혀 그려낼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 이상이라는 것이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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