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논객 노정태가 다시 읽은 진보 논객들, 그리고 그들과 우리의 시대. 큰 줄기는 1990~2000년대의 회고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재현들과 달리,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낭만적으로 회고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책의 성격을 ‘총정리’라고 부제에 설명하긴 했지만 오히려 비판적 성찰에 가깝다.

대중들이 다양한 인문, 사회 담론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던 그때를 회고하기는 하지만, 그때의 어떤 논리들과 방법들과 선택들이 오늘의 상황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의도, 효과, 부작용, 가능성)에 천착하는 책이다. 물론 이미 이런 문제의식에서 ‘민주화’ 이후 혹은 신자유주의 이후를 성찰하는 작업들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특히 사회과학의 시대가 저물던 무렵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준 논객들을 통해 이 시기 이후의 변화를 정리해본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변화의 한복판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짚어가며 숲의 새로운 형상을 또렷이 그려낸다. (알라딘 책소개에서)

 

 


 

 

뱀발.

 

1. 저자는 우석훈님을 가르켜 제목의 부제를 달아 놓았더군요.  "청년들에겐 꼰대, 386에겐 광대"  처음엔 88만원 세대로 문제점이 있지만 짚을대로 짚은 것은 아닌가? 유행의 물꼬는 많은 것을 보이지 않게 합니다.  그 뒤 모임 세미나를 통해 짚지 못한 틀 사이의 것을 논하기도 했습니다. 삶을 절박하게 살아내는 이들이 더욱 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 깊이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도 지지난 과거의 잣대로 세상을 보려는 습속은 곳곳에 남아있죠. 쌍팔년도 역전의 훈장이 아직도 유효하니까요?

 

2. 올바른 비평은 보지 못한 곳, 볼 수 없었던 곳을 더듬게 만듭니다. 지금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지난 과거나 추억이 아닐테죠. 과거의 낱낱을 복기해보면서 지금의 얼굴을 되비추이는 곳, 그래서 앞을 그렇게는 걷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닐는지요. 여전히 세상은 어둡고 칙칙하지만 몇몇의 논객이 아니라 삶의 붙박이들이 더 예민한 안테나가 많으면 많을수록 현실을 타개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단순한 덧셈에서 곱셈에 대한 고민의 지점으로 같이 복기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불혹, 지천명, 아직도 청춘이라 여기는 이들. 꼰대는 꼰대의 딱딱함을 벗기 위해서 광대는 광대가 아니라 시대의 맥락을 읽어 표현하는 말뚝이로서 말입니다. 불타는 청춘은 좀더 같이 세련된 다양한 길의 분기점을 헤아려보는 자리로서 말입니다.  같이 읽어보면 어떨까요.

 

3. 아래 책의 1장 가운데 이론, 비평, 사상이라는 에세이가 겹치더군요. 유행의 너머, 유행의 소비를 넘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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