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사고 하나, 둘, 셋]과 주강현의 [두레], 그리고 이 책을 함께 빌려오다. 관심있는 [여행의 사고 셋]를 읽기 전에 봐두어야 할 의무감 같은 것이 설핏 든다. 그래서 일터 당직을 겸해서 주말 완독을 하다. 메타포, 비유와 은유라는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철학의 틀이 가지고 있는 메타포를 되짚어 봐야 한다는 말에 책장을 덮으며 공감을 표한다. 국민-국가-사회의 틀 안에서 학문이나 사유의 틀이 멈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정작 유동하고 이동하는 것의 아우라나 맥락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말한다.
음~ 뭐라고 말할까? 예를들어 자동차가 원인이고 자동차를 타지 말고 줄이자. 자동차가 지구가 더워지는 것을 비롯해 문제라고 하자. 카풀도 좋고 전기자동차도 좋고....이렇게 저렇게 다 좋다고 하자. 그런데 자동차를 가운데 두고 바뀌거나 바뀐 맥락에 놓여있는 것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대안이며, 하물며 자동차가 줄어들거나 드문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는 그저 공상 속에 있는 그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동차라는 사물이 삶과 딱딱한 것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력을 제대로 살펴보는 것들. 그래서 대안의 하나 둘 셋을 점검할 수 있는 기재로서 되돌이켜 보는 방법이나 기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과 장 사이 간극이 있는 것 같아 일목요연하게 동의하지는 못하겠고 일단 거칠게 맥락을 이해하며 생각창고에 키핑해두기로 한다.
사회학을 넘어선 사회학
이 책에서 나는 세 가지 주요 논점을 논하고 전개했다. 첫째, 그동안 사회학은 사람의 이동에 관한 분석을 간과해왔다. 사람의 이동은 너무 흔한 행위지만, 제대로 고찰하려면 적합한 메타포가 필요하고 사회학의 개념이 전환되어야 한다. 아울러 전에 없던 공간과 시간을 개척하는 여러 이동을 포함해 사회과정을 재고해야 한다. 둘째, 이동하는 사람들에 관한 개념은 메타포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다양한 실체의 이동, 곧 관념, 이미지, 기술, 화폐, 폐기물 등의 이동으로 옮겨낼 수 있다. 이동은 어는 경우에도 하이브리드며 다양한 스케이프에 따른다. 그러한 네트워크는 '물리적' 실체와 '인간적' 실체로 구성되며 양자의 복잡하고도 가동적인 결합이 그러한 실체의 힘을 이끌어 낸다. 셋째, 이처럼 이동하는 하이브리가 자기생산적 '사회'의 성질 또는 사회학이라는 영역에 파탄을 초래하고 있다. 바우만의 유명한 '정원사'라는 메타포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바우만은 국가가 감시를 통해 주도하는 근대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이 메타포를 사용했다. 바우만에 따르면 정원사 국가는 그와 대조되는 종전의 '사냥터를 관리하는' 국가를 대신한다. 313
존 이언 요약문

책장을 넘기다가 루쉰의 거처를 살피는 점, 쑨거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흔적을 매만지는 모습이 있어 꼭 읽고 싶은 책이었다. 지역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유독 한 곳에 여러 권의 책이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공부해왔던 것이 여행을 통해 검증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흔들리면서도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2년간의 체류와 번역의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홈이 패이고 그 곳에 물이 찬다는 표현을 쓴다. 그 패인 홈에 물이 여러 글들로 표현되고 자양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샘물같은 그 물들이 글로 소진할 때, 또 다른 여행을 기획하고 떠나게 된다고 말한다. 사진이 맺혀있고 그 여행의 사고를 대변하는 것 같아 좋다.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사고와 고민을 현실에 숙성시키는 모습이 좋다. 데이지 않도록 사람을 자제하는 모양도 수긍이 간다. 루쉰의 서성거리는 모습이 인상깊다.
여행의 사고 셋 가운데 샤오닝과 상하이 편 가운데(콕!)
몇장을 보다가 접어둔 책이다. 책 날개가 접혀있는 곳을 펼치다. 아~ 중세의 진면목의 이력을 볼 수 있다. 감성이 아니라 이론과 논리, 역사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천년의 역사가 암흑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시스템이 만들어진 과정을 낱낱이 알 수 있겠다 싶다. 교육, 학교 시스템, 수도원 지침, 내규, 운영의 세세한 과정의 이력까지 없는 것이 없다. 어둠의 그늘로 들어오자 명암이 다시 나뉜다. 어둠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이다. 자본주의의 시작이 불현듯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중세란 빙하속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통해 피어난 것이겠다. 자본주의가 빚지고 있는 아무거나가 다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역시 무지에 빛이 들면 다 좋게 보이는가보다. 제도의 낱낱과 논쟁, 문화의 주변을 변변하게 살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중동내고 다시 날개를 접다.

이 책도 오늘에서야 손맛을 보게 된다. 두껍고 도식적인 [철학의 책]이다. 책읽기전에를 건너뛸까하다 다시 본다. 철학의 이력과 책 보는 법이 깔끔하다. 묵자. 소크라테스, 싯타르타의 사성제와 법륜이라는 팔정도 그리고 맥락을 짚어주는 도식이 자리잡고 있다. 러셀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봐 줄만은 하다고 마음을 둔다. 메타포의 하나로 살펴보면 좋을 듯 싶다. 지금을 다양한 시선과 관점에서 보는 잣대로 살펴봐도 좋겠다는 느낌이 든다.

[한자의 모험] 저자의 이력이 신기하기도 해서 읽어 두었는데, 아마 그래서인지 행서 쓰기와 전서 예서 초서 행서 오체 천자문까지 구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상형을 그대로 드러내는 전서는 매력적이다. 마음 심에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형상이나 사람 인이 다양한 자태에 그만 놀랍기도 하다.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자한자 몸이 받아들일 속도로 보는 맛도 괜찮다. 구양순과 왕휘지의 비문글씨를 하나하나 읽고 따라가는 맛도 괜찮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