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의 세계에서 비판적 사유의 과제는 대립항을 영원히 분리시키거나 성급하게 적대성의 지양을 꾀하는 게 아니라, 얼마만큼 그 사이에서 전이의 공간을 열어낼 수 있느냐에 있다. 94


상층부에는 정권 투쟁, 계급 투쟁 등에 사용되는 이념, 이데올로기, 이론 등의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 관념들은 정치 투쟁에 활용되어야 하는 만큼 비교적 체계화되어 있으며 가시화되어 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면 정치 현상에 대한 대중의 견해, 더 아래에는 그런 견해들 배후에 버티고 있는 생활감각이 자리한다. 버변으로 내려갈수록 이론화 정도는 약하며 가시성이 낮아진다. 또한 정신 구조의 상층부에 복수이되 제한된 수의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경합하고 있지만, 대중의 견해와 감각은 보다 파편화되어 있다. 96


하층부로 내려오면 세계상이 아닌 현실의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복잡하게 엇갈리며, 더 내려오면 언설의 영역에서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생활감정과 실감이 자리한다. 이 경우에도 위로 올라갈수록 추상성과 체계성이 높아지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다. 마찬가지로 생활감정이나 실감으로 떠받쳐지지 않는 이론 내지 학설은 공허해지며, 거꾸로 세계관으로 방향을 부여받지 못하는 실감은 맹목적일 수 있다. 97


정치를 사고할 때 이런 성층 구조를 읽어내지 못한 채 가시화된 이념과 이데올로기만을 주목한다면 현실에서 유리되고 만다. 바로 정치사고의 이런 양극을 오가는 사고를 나는 '정치적 사고'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때 필요한 감수성을 '정치감각'이라 불러보고 싶다. 그리고 정치적 사고와 정치감각은 현실정치만이 아니라 일반의 정신세계에서도 요구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97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는 같은 정치사고의 위상에서 충돌하거나 경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수주의는 한 가지 '주의'를 고수하지 않으며, 상황에 따른 처세술에 가깝다. 원리 없음의 원리주의다. 보수주의는 뼈대를 갖지 않기에 그 실체를 포착해 비판하기는 어려우며, 역으로 보수주의가 일상감각에 침투하는 일은 쉬워진다. 보수주의는 습관화된 생활양식이나 타성적인 정치인식에 조응하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자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무장할 필요가 없다. 98


체제를 적극적으로 바꿔가려는 진보주의는 기존의 권력구조, 사회제도, 문화양상을 종합적으로 인식해 당면한 정치 상황에서 미래의 전망을 확보해야 하기에 이론적 무장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이론적으로 꿰차기 어렵지만, 진보주의는 그것이 전제로 삼는 학설과 세계관을 통해 파악하기가 수월하다.또한 보수파가 이론적 일관성을 지향하기보다 상황에 맞춰 심정에 호소하다보니, 진보파가 이론적인 공박에 나서도 보수파의 영향력을 감퇴시키기는 어렵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피력해도 현실정치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그리하여 논리로는 이기지만 실제로는 밀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99


그들의 당위적 이념도 정치적 올바름도 일상감각을 쉽게 뚫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일상감각이란 애초 보수적인 것인지 모른다. 일상이란 내일도 오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몰론 대중은 보수적이지만 진보적으로 움직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양면성은 모순되지 않는다. 감각의 보수성과 행위 선택의 진보성은 다른 층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99


상층부의 세계상과 하층부의 일상감각 사이의 공백지대를 메우는 시도가 요구된다. 여기서 거창한 이론 이전에 정치감각이 필요하다. 바로 당위의 세계와 생활감각의 세계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정치적 리얼리티에 대한 감각인 것이다. 올바른 이념은 어떻게 현실로 진입할 수 있는가. 큰 정치의 동향은 어떻게 일상정치의 과제와 맺어질 수 있는가. 상이한 정치사고의 층위 사이에서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치감각은 생득적이거나 환경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물음들을 끌어안고 그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다. 101

 

2


위기에 대한 서로의 실감이 공유되지 않는 위기이다. 현상의 위기가 아니라 감각상의 위기이며, 현실감각이 파편화된 데서 기인하는 위기다. 104


위기의 그림자는 사상계에도 드리워 있다. 무엇보다 사상계가 내놓는 지적 산물이 일상인의 피부감각에 닿지 못한 채 지식인의 자가소비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향 속에서 나는 위기를 감지한다. 위기를 공유할 공동의 언어를 제련하지 못한 채 해당사항의 무게가 각자의 심적 분위기 속에서 흩어져 고립화와 아울러 사고의 획일화가 번져가는 데 일상의 위기가 있다면, 사상계도 유사한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어쩌면 지금 사상계는 일상세계보다 더 빨리 얼어붙고 있으며, 위기는 더욱 심각한지도 모른다. 버블경기가 꺼지자 곳곳에서 부실한 사회의 골격이 드러나듯, 현란했던 지적 거품이 현실에 씻겨나가자 사상계는 자신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107


자신의 사고와 언어가 자기 혹은 자신의 서클을 떠나 바깥에서 얼마나 통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고, 바깥에서 유효성을 시험한다는 노력이 잊혀진다. 발신을 하는 경우에도 그 발신이 타인의 필터에 걸러져버려 타인의 현실 이미지를 흔들지 못한다면, 상대의 현실 이해를 뒤떨어진 의식 혹은 오류에 사로잡힌 의식으로 취급하기에 더욱 강하게 발신해 계몽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마저도 번번이 허사로 돌아가면 자신의 내면 세계로 후퇴한다. 107


이론과 현실이 예정조화를 이루리라는 신념은 이론을 신앙으로 변질시킨다. 논리와 추상의 세계가 현실을 통과하지 않고 이론의 약속에 따라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는 신앙이 만들어지면, 현실에 대한 부채를 총체적 이론화를 통한 현실의 총체적 변혁으로 되갚고자 한다. 그리하여 현기증 나는 이론은 현실을 무시한 채 가능성을 두고 내기를 건다. 게다가 그 이론이 애매한 휴머니즘에 물들면, 이론의 물신화 경향은 좀처럼 자각하기 힘들어진다. 109


이중과제란 정신세계의 종적 구도에서 보았을 때 사상과 일상감각을 이어 맺는 것이며, 횡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개개인의 현실 이미지가 자기누적으로 굳어가는 것을 무너뜨리고 개별화되는 현실 이미지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이다.  110


인식대상에 내재해 지식인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이 경우 윤리성을 지식인의 '당사자성'으로 옮겨 음미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사자로서 상황에 내재한다는 것이 지식인에게는 경계 위에 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계 위에 있다는 것은 안측과 실감을 나눠 가지면서 바깥 측과 교통하여 내부의 이미지가 자기누적에 의해 굳어가는 것을 무너뜨린다는 의미다. 그렇게 안을 통해 안을 넘어서는 전망을 추구하는 자가 지식인인 것이다. 그리고 지식이이 사유의 거처로 삼아야 할 경계란 고정되어 있지 않다. 116

 

생활의 감각과 실감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이론과 학설, 교의는 공허하며, 거꾸로 이론과 지식 혹은 세계관에 의해 방향지어지지 않은 생활감각과 실감은 맹목적이다. 바로 이 공허와 맹목이 지금 정신과 정치의 위기를 낳고 있으며, 사상이야말로 이처럼 갑갑한 상황 속에서 가장 고통을 느껴야 할 지성의 영역이기에 스스로가 섶을 안고 위기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117


3

 

쓰기가 진정 값진 체험이 되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발효가 되어야 한다. 정신적으로 발효되기 위해서는 쓰기에 나설 때 쓰기를 가동시키는 여러 요소를 셈세히 관찰해야 한다. 거기에는 정신의 지침을 좌우하는 터부, 감수성의 말단에서 그물을 치고 있는 인정욕망, 모방심리, 허영 그리고 불명료한 인식, 추상적 지성, 침전된 기억, 선입관, 습이 교착하고 있다. 체험에 육박하는 표현을 이끌어내려면 그 요소들을 관찰하고 자기 사유의 한계와 대면하고 상투적 언어감각을 추궁하며 어디까지 표현을 낼 수 있는지를 차갑게 따져 물어야 한다. 168

 

긴장관계 어린 파편들을 섣불리 종합하거나 화해시키지 말고 그 간극 속에서 표현을 빚어내야 한다. 작가의 표현을 거치고 나서도 파편들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파닥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작가는 생동감 있는 표현을 골라내 파편들을 부분들의 집합 이상으로 승화시켜내야 한다. 텍스트의 소명이란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파편들을 모아 균형을 부여하되 각 파편들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170


논리적으로 글을 작성할 능력도 없으며 답을 내지도 못한다는 제약의 조건을 가능성의 계기로 전환시켜 답을 향해 체계적으로 짜인 글을 써낼 수는 없을지언정 자신의 물음을 속이지 않는 글을 쓰려는 중이다. 답을 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물음을 향한 절실함을 내리누르지 않는 글. 지식의 언어로 구축된 세계와 피부감각의 세계 사이의 단층을 주시하는 글. 사고의 힘이 부족해 비약을 거쳐 섣부른 결론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닿는 데까지 사고의 절차를 구체화하는 글을 쓰려는 것이다. 176

 

 

뱀발.

 

1. 반갑고 고맙다. 저자는 7가지 감각 가운데 다섯가지 감각에 대한 에세이를 실었다. 앞으로 몇년 뒤가 될지 모르겠지만 역사감각과 또 다른 지적모색에 대해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번역감각은 직접 다룬 적이 없어 생소했지만 그가 다룬 이론이 아니라 감각에 대한 에세이는 참 좋다.

 

2. 사유를 왜 밀고 나가지 못했는지, 고독이 왜 부족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글이다. 발효와 숙성이란 말을 어루만져서 고맙다. 책이 아니라도 말한마디 단어 하나의 울림이나 공감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3.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극진한 그의 글 사이사이 루쉰이 읽힌다. 덧붙이고 싶지만 그대로도 좋다.

 

4. 세상은 루쉰이 말했듯이 왕년에 누려본 기억이 있는자는 늘 지금이 좋다하고, 가진 것이 많이 있는자도 지금이 좋다하고 가질 것이 많은 이도 지금이 좋다라고 한다. 가진 것이 줄어드는자도 가진 것이 뭣도 없는자도 더 위험해질까봐 지금을 부정하지 않는다.

 

5. 사유의 바닥은 모두 함께 딛어야할 지지대이다. 진보가 왜 장밋빛과 햇살만 유념하는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찬란한 이념이 보수주의가 왜 강할 수밖에 없는지 논란도 없는 지금이 안타깝지 않은가?  원리가 없다는 원리주의의 강건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우리끼리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결코 다른 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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