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비주의란 기분 전환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처량한 사상이다. 소비 행위를 일반화하고 반복하여 지상에서 일신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를 구하는 사상이다. 아울러 어느 누구도 무언가를 꾸준히 갖지 못하게 만드는 금지의 논리다. 청바지 디자인도, 선호하는 연예인도, 인문적 지식도, 정치적 이념도, 윤리적 신념마저도 유행에 맞춰 갈아치워야 한다. 57 그러나 진정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섣불리 소비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값싸게 위로하기보다 아프게 긁는 것 아니겠는가.
대중매체가 내주는 정보는 공들여 모아봤자 하루만 지나면 흩어져 사라질 것들이 태반이다. 대중매체에서는 경중이 아닌 신선도에 따라 정보의 가치가 매겨진다. 새것이 낡은것보다 가치 있다. 그리하여 어제 들춰진 사건은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 오늘 새로운 사건들에 밀려난다. 나의 정신은 나날이 모습을 바꿔가는 시사적 현실이라는 여신에게 매일같이 봉사하고 있다. 53
"나는 (남의 일을)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대중매체적 관음증과 "나는 유명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소비주의적 노출증이야말로 현대 문화가 양산해낸 현대인의 집단 병리다. 56
참기 힘든 장면을 많이 접할수록 우리의 관용은 타락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주 목격할수록 우리는 민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커져간다. 연민을 자주 처방받아 복용한 까닭에 타인의 고통에 내성이 생긴다. 이것은 포만한 시청자에게서 발생하는 현대적인 윤리적 타락이며, 현실감각의 타락이다. 66
왜 연민을 일상적으로 원하는가. 연민은 부끄러움처럼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감정이며, 부끄러움과 달리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때 누릴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연민은 해체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상상의 공동체를 재구축해준다. 우리는 연민하고 감동받기를 원한다...울리는 동정하여 그들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내민 손을 정말로 잡아서는 안된다...사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싶지만 알고 싶지는 않다. 67-68
2
[다양한 의장] 고바야시 히데오 - "상품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마르크스주의는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의장으로서 인간의 머릿속을 횡행할 때 그것은 이미 훌륭한 상품이다. 그리고 이 변모는 상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잊게 만든다."
반체제 정신도 고급 이론으로 유통되며, 진보적 사유도 학술적 반동성과 결부되는 아이러니의 시기가 온다. 현실을 바꾸겠다는 변혁의 열정도 지적 허영에 물들면 현실을 바꾸는 대신 현실을 그 이론의 언어로 정제해놓는 데 쓰인다. 25
그렇게 이론을 제시하고는 그 영역을 지키느라 생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학자로서의 본본이자 최고의 학문적 생애를 보내는 방식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대개 무망하게 끝난다. 유행이 지나가듯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추상적이며 비개체적인 이론이 다층적 해석에 노출되어 현실에 씻겨나가는 것이다. 27
자신의 의장을 벗겨내려면 스스로 분해되어야 한다. 인식의 은밀한 동기를, 사고의 타성을 스스로 타인의 시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자신의 진실은 자신을 비인칭으로 경험할 때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충만한 내적 긴장으로 스스로 강한 시차를 만들어내 자신을 타자로 체험하며 자신을 해체시키고 재건해야 한다. 41
3
양떼 인간은 자주 외롭지만 고독할 줄 모른다. 타인과 교류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으니 '개인'으로서 외로움을 타지만, 고독할 줄 모르니 '개인적'이지도 못하다. 50
뱀발.
1. 어제 환갑이 넘은 분과 얘기를 나눈다. 60이 넘어서면서 쳬력이 급 고갈된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나이 쉰에 몸관리를 잘해줘야 한다고 한다. 푼돈이라도 벌 수 있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국민연금에 작은 돈, 그리고 친구들과 소일거리 삼아 쉬는 날 당구치고 술마시고 보낸다고 한다. 밤새 비라도 오는 날...말벗 하나 없이 지내는 외로움을 말한다. 24시간 말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노인네들이 더 노인으로 만드는 것은 다 같이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았기에 자기 고집을 꺽거나,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은 외롭고 혹시나 얘기할 상대가 있다면 그렇게 제 고집을 지르고 만다.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추함의 실뿌리가 널려있다. 텔레비젼은 혼잣말을 하고 있다.
2. 저자는 이론과 비평, 사상을 나눈다. 지식도 정합성, 기능성이 아니라 윤리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지식이 이론으로 학문 자체의 정합성을 따지든가 저널과 같이 논리와 깊이는 없더라도 보여주고 싶은 기능성을 따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들을 논한다. 지난 번 인근도서관에서 황해문화 봄호를 보았다. balmas님의 지젝, 바디우, 네그리와하트, 아감벤, 랑시에르를 논하면서 흡사 국내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보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행여 포스트-포스트의 유행의 조짐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낳는다. 이들이 공통된 것은 정치바깥의 정치를 이야기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미는 그래도 유행처럼 폄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 아닌가 한다.
3. 최근 일련의 흐름을 통해 우리 지식인에 대해 느끼는 것이 있다. 소유욕에 질투심, 때로는 이기심이 보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의 말처럼 지식을 상품으로 구매하고, 유행이 지나면 버리고....차마 새로운 이론들은 그 지식인들 그룹에 머리를 거쳐 위에서 소화되기도 전에 토해내기 급급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론도 소화가 안되니, 그 근본을 문제삼는 비평은 하물며 더 없다. 이론이 투명하고 적합성을 가진다면, 비평은 비난과 비판이 아니라 그 불투명함을 끊임없이 어루고 찾아내는 것이라 하겠다. 님은 이렇게 말한다. 사상이란 것은 이론을 자신에게 소화시키면서 소화시킨 것들 사이 겪어내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비평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지식이란 것이 학문과 기능에 안주하지 않아 윤리를 그때서야 갖게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4. 고바야시 히데오의 지적처럼 마르크스주의자도 넘쳐나고, 니체주의자도 넘쳐난다. 강신주주의자도 넘쳐난다. 거꾸로 반을 붙여도 좋겠다. 저자는 모두에 이렇게 말한 점이 인상깊다. 소비주의는 일신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를 구하는 사상이다. 이론가도 없고, 비평가도 없고, 사상가는 하물며 무엇을 말한텐가? 소비가만 있다. 물고 뜯고 할퀴고..또 물고....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흥미진진하다. 반신자유주의, 반자본주의, 비자본주의 보다 소비주의를 넣어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5. 아직 읽고 있다. 아니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