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집은 새롭고 신선하고 신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떠난 이후 집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모든 가구와 창문과 램프가 일깨웠을 의무가 잊혀졌다는 것은 집에 안식일과 같은 평화를 가져다준다. 처음 몇 분 동안, 단 한 번만 존재하는 방과 구석이나 복도 안에 있는 듯이 느끼며, 이러한 느낌은 그곳에서의 나머지 삶이 거짓말처럼 보이게 만든다. 세상이 노동의 법칙 아래 있지 않다면, 세상은 지금과 다르지 않고 별로 변한 것이 없지만 나날이 축제 같을 것이며, 휴가에서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의무는 휴가 때 놀이만큼 가벼울 것이다.  153

 

반짝 1. 시선이 따듯하다. 우리집에 돌아온 몇 분의 행복이 세상이 노동의 법칙 아래 있지 않다면 가능하다고 하지 않는가? 축제 같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후기 자본주의에 살아지는 우리는 그 쳇바퀴같은 일상을 반복한다고 하지 않는가? 노동의 법칙 아래 있지 않게 하려면... ...


좌파 낙관주의는 '사람들은 악마를 벽에 그려서는 안 되며 밝은 면만을 보아야 한다'는 음흉한 시민적 미신을 되풀이한다. "이 세계가 그 신사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요? 그럼 그는 더 나은 세계를 찾아야겠군요." 이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일상어이다.  정통 노선 이탈  156

 

반짝 2. 난 좌파 낙관주의자다. 유토피아를 꿈꾸고 더 나은 세계를 자꾸 찾으려한다. 그 이면을, 아니 다면을 살피려하지 않는 우둔함이 잠복해있다는 사실을 애써 있으려 한다. 아도르노는 여기서 노동과 계급의 문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좌파 낙관주의, 그대 세상은 흘러가고 놓치거나 만들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쓸데없는 낙관이 가리고 있는 그림자들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기나 한 것인가 되묻고 있다.


어떤 손님이 아무리 오래 기다렸더라도 그 사람을 담당하는 종업원이 다른 일로 바쁜 경우 다른 종업원이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다. 제도 자체를 신경 쓰는 일-이런 것은 감옥에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이 병원에서처럼 사람을 배려하는 일보다 앞서게 되며 주체는 단지 객체로 관리될 뿐이다. 159

 

반짝 3. 후기자본주의는 제도에 갇힌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손님은 늘 객체다. 마음도 살피지 못하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그저 처분만 하는 구조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불편을 모아 나름 종합적으로 대접을 한다고 하나, 그 노회한 장사꾼의 본심은 조금 거리를 두자마자 드러난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그때그때 가장 새로운 방식을 소비하려는 열광은 최신의 방식에 의해 무엇이 제공되었는가보다는 최신의 방식 자체를 중요시하며 쓰레기더미로 변한 정체 물량과 계산된 백치 행태를 조장한다. 이런 백치 상태는 포장만 조금 고친 낡은 조악품을 최신품으로 간주한다. 기술적 발달의 고마운 조력자는 더 이상 수요가 없는 재고품을 사지 않으며 고삐 풀린 생산 과정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한심한 소망이다.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의식, 구름처럼 몰려가기, 장사진에 한 다리 끼기 등이 사방에서 일어나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자 하는 욕구를 밀어낸다. 161..사람들은 개봉한 지 벌써 석 달이나 지난 영화보다 방금 나온 영화를 기를 쓰고 더 좋아할 것이며-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석 달이나 지난 영화에 대한 혐오감은 아주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작곡에 대한 혐오감 못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광적인 사랑에는 무숙자의 감정이 상당한 역할을 한다. 그 근본에 깔려있는 것은 시민들이 부당하게 '자기에게서 도피', '내적 공허에서 도피'라고 부르는 것이다. 함께하려는 사람은 달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심리적 공허감은 사회가 개인을 부당하게 흡수해버린 결과이다. 사람들이 도망가고 싶어하는 '지루함'은 오래전에 시작된 도망 과정을 재투영한다. 그 때문에 오직 괴물같은 유흥장치들이 더 번창하고 있지만 누구도 거기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188

 

반짝 4. 소비, 소비, 소비 그 뒤에는 쌍으로 건망, 건망, 건망...이 시공간에는 합리적인 욕구가 없다. 신상이나 새로나온 영화에만 열광 속에 아둔함은 없어보이는가? 끊임없이 잊기 위해 해소하는 그 일상이 보이지 않는가?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의식, 그 위축.......뭔가 이상해보이지 않는가?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쇼윈도우에 갇힌 우리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가? 아 저기 내가 보인다. 쇼윈도우 속에 넋이 빠져...도통 세상이 왜 틀어졌는가 궁금하지도 않는 내가 새책을 보며 처박아두는 모습이 보인다.

 

상상력은 무의식의 소관으로 넘겨지고 인식 이론에서는 판단력이 결여된 유치한 퇴화된 기관으로 배척되지만, 오직 상상력이야말로 모든 판단의 절대적 원천인 대상들 간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상상력이 추방되면 진정한 인식 행위인 '판단'도 추방되는 것이다. 지각으로 하여금 갈망이나 예상을 못 하게 막는 통제 장치가 '지각'이라는 것을 아예 거세시켜버리면 지각은 이미 알려진 것을 무력하게 반복하는 쳇바퀴 속에 갇히게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성의 희생을 초래한다. 고삐 풀린 생산 과정이 최우선시되고 '무엇을 위하여'를 묻는 이성이 사라지고는 이성이 스스로에 대한 물신주의에 빠지면서 외부의 권력에 굴복하게 됨에 따라, 이성 자체는 도구로 전락하고 그것을 다루는 기능인들의 사유 장치는 사유를 막는 목적에만 사용되며 이성 또한 이러한 기능인들과 유사하게 된다. 167

 

개성을 시장에 팔기 위해 내놓은 사람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언도한 판결을 스스로의 판단인 양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이 당한 불의를 객관적으로 정당화한다. 그들은 사회의 보편적 퇴행을 사적인 퇴행으로 축소 재생산하며, 그들이 목청을 높여 저항하는 것조차 대개는 약자의 노회한 적응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183

 

반짝 5. 상상력이 추방되면 판단도 추방된다. 지각을 거세시켜버리면 이미 알려진 것을 무력하게 반복하게 된다. 무엇을 위하여... ...일터에 다니고 다른 정당에 대한 입장을 갖고 바뀌지 않으며 진자가 반복되어 움직인다. 왜 생각하지 않는가? 사유라는 것은 창고에 폐기된 것처럼 살아지는 사람들로 넘쳐나는가?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진보를 떠나 일상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은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더 너머서려고 조차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평범성은 또 비슷한 박자를 타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실증주의는, 현실 자체에서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사유의 거리를 다시 한 번 깎아내린다. 위축된 사유가 자신이 파악한 사실들을 요약하는 임시 처방 이상이 되려 하지 않을 때, 현실에 대한 사유의 자율성과 함께 현실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사유의 힘도 사라진다. 삶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때에만 사유의 삶은 전개되며 경험계에 제대로 관여할 수 있다. 사유가 사실과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한 비판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동안 사유의 운동은 적지 않게 '차이'에 대한 감각에 의존한다. 171

 

반짝 6. 삶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때만 사유의 삶은 전개된다. '차이'에 대한 감각에 의존한다. 실증주의, 데이터, 객관을 가장한 이야기들 속에 삶이 없다.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거리를 유지할 때다. 그래야만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뒤따르는 것이다. 살고 있는 일상을 끊임없이 새겨보고 다시 보려하는 감각, 그래야만 최소한의 올바른 삶들이 기웃거릴 수 있다.

 

관심사를 추구하고, 실현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소위 실천적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는 접촉 인물들이 자동적으로 친구와 적으로 변한다...다른 사람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기능으로 보지 않고 인물 자체로 보는 능력, 생산적인 대립 관계로 만들 능력, 자기와 모순되는 것을 포용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위축되는 것이다. 그런 능력은 판단적인 인간 지식으로 대체되는 바, 이런 지식에서는 결국 가장 좋은 사람은 더 적은 악이 되며, 가장 나쁜 사람도 최고악이 되지는 않는다. 177

 

반짝 7. 친구를 가려서 사는 사람들, 관심사를 밀어붙이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 의욕과 목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드러낸다. 그들의 무지를 탓한다. 인물자체를 보는 능력, 생산적인 대립관계를 만드는 능력, 모순을 포용하는 능력을 애써 보지 못한다. 자본주의 속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너도 ..... 나도...  늘 나에 머물러 있다. 너가 되지 못한다. 한번도 나-너는 되어보지 못하면서 살아진다.

 

 

 

 

 

 

 

 

뱀발. 천천히 보다. 우울과 허무를 들여다보는 이유는 그 허무와 우울이 이 기름기를 띄우고 있는 물같은 바닥이기 때문이다. 바닥을 치고서야 이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실체가 보인다. 버스와 비행기로 관전하는 것이 아니라 추체험이다. 오롯이 겪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 블로거의 리뷰를 본다. 아도르노가 왜 우울과 허무를 캐내려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숲을 거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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