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교육은 책 속의 앎이나 지식의 전달과 수수가 아니다. 결과만 쏙 빼먹는 비타민도 영양제 같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근력을 키우려고 몸에 땀이 배여나오게 하는 과정이다. 홀로 생각해 쌓아두는 사상누각은 더더구나 아니다. 수십번 자신과 다른 생각의 벽에 부딪혀야 하는 과정이다. 이로 말미암아, 색깔의 차이, 느낌의 온도차가 서로스며들고 나왔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질감이 몸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다른 처지, 다른 입장, 다른 삶, 다른 정보원들을 꼼꼼이 비교-선별해보기도 하고 너의 입장에 서서 그 생각뿌리를 헤아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옳은 것을 주입시키고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입장을 가져야 한다가 아니다. 정치 교육에 있어서는 다양한 사례, 논점으로 그대로 받아 안아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 상황들을 대면해서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시간의 틈, 몸이 그 상황에 자리잡을 수 있는 간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만의 관점이 아니라 나-너란 생각의 저수조가 생기게 된다. 그 가운데서 겨우 처지와 관점을 달리하며 서로 섞이는 과정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최고, 나의 입장이 우선이란 사실들이 무뎌지면서 자기의 관점과 시선, 자신이 몰랐던 자신의 입장에 대면하게 된다. 남의 시선, 빌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정치상황과 세상을 좀더 종합화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흔히 정치적인 입장은 자신이 자라온 곳과 가족의 분위기에서 대물림된다. 지금 여기는 정치관이라는 것도 기껏 수업시간에 지식의 전달만 있을 뿐이다. 처지와 입장이 다를 수 있고, 노동자로서 근로자로서 존재조건을 깨우치는 과정, 보호받아야할 최소한의 권리도 알려주지 않는 셈이다. 학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조차 하지 못하며 되고싶어하는 자들을 대변하기 일쑤이다. 되고싶어하는 자의 입장으로 세상을 보게 만든다. 피해자의 입장, 다른 계급, 계층의 눈높이에서 되살펴보는 일은 거의 없다. 그 입장의 차이를 소비의 다양함 만큼 서로 나누고, 다를 수밖에 없는 의견들을 비교하지도 않는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사회에 받은 냉대와 사회가 욕망하는 시선만으로 자신을 한탄할 뿐, 자신이 놓여진 자리를 다시 돌이켜보지 않는다. 세상과 사회의 불합리를 왜 자기 혼자 독박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 왜 내탓만 해야되는지? 세상에 버려지거나 던져진 자신의 조건과 처지를 냉정히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기회조차 없다. 언제나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한결같다. "낙타바늘로 들어가라. 돈벌자. 내자식에게 그럴 수없잖아. 내탓이잖아."
나도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장애인으로 내가 낼 수 있는 정치적 입장과 목소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젊은이와 노인의 차이에서 다른 발언을 해야되고, 그 입장이 섞여야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재갈을 물려 어른의 목소리를 주입한다. 입장차이는 정치적 차이이기도 해야 한다. "제발 잠 좀 자게 냅둬라, 당신은 질풍노도 안거쳤냐?"
힐링과 치료, 치유가 아니다. 자신의 처지와 그 입장에서 정치의 다양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만을 문제로 삼고 거기에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만의 치료방법에 집중하는 것이다. 거꾸로 힐링이 유행하는 만큼 이 사회가 나만 생각하고, 나에게 빠지게 만들고 "나" 곁에 "나-너"가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나-너를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부자와 돈의 도그마에 벗어나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너의 문제라는 사회의 문제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른 입장, 다른 방법,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세상과 사회가 자신의 몸과 입장을 말해줄 때, 공감하게 되며 삶 속에서 활력의 근거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자살과 우울병, 약물로 갇힌 나를 살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세상의 다른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고, 자신에 공명하는 다른 색깔의 정치적 목소리를 찾게 된다. 나에게 사회는 이런 식으로 바뀌어야 최소한 숨은 쉴 수 있다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소견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하며, 골고루 맛볼 수 있는 느낌의 정치교육과정이 스며들어야 한다. 사생활, 정의, 인권, 노동권....모두 알면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우쳐야 되는 질적으로 다른 기술이다. 자전거와 수영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또 다른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돈과 내자식 내가족에게만 빠진 내맛대로 삶이 치뤄야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마을이 키워낸다는데, 이 사회가 키워내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걸 보면 거꾸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놔야 하는지가 각성의 잣대는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