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년층은 과계몽된 상태다
지금의 청년층은 미계몽되었다기보다는 과계몽된 상태다. 그들은 '부모 세대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운동으로도 반전할 수 없다는 사실 까지 이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지식인의 조언은 상당히 기괴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사춘기'에 가능했던 저항의 형식을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체제는 68세대나 386세대와 같은 '그 청춘'들이 다시 등장한다 하더라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을 살 수 없다면 부모 부동산을 물려받으려 하고, 얼마 안 되는 일자리 안에 나만은 포함되겠다고 판단하는 것이 청년 세대다. 이런 모든 주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일자리 만들기'는 한계에 부딪혔으니 '일자리 나누기'를 사유하자는 고민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233
진보는 복거일이나 공병호가 아니라 김훈이나 장영희를 상대해야 한다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복거일이나 공병호와 같은 우익 필자들을 비판하거나 조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것, 본인과 복거일이 경쟁하고 있는 그 장에 청년들을 끌어오는 일이다. 출판 시장에서 그들의 대립각에 서 있는 것은 복거일이나 공병호가 아니라 차라리 김훈이나 장영희일 수가 있다. ...... 여기서 나는 김훈이나 장영희를 읽는 독자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거나 정치적 보수주의자라고 질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려는 바는 정반대인데, '좌우' 변별과는 상관없는 이러한 '삶의 태도'의 영역을 진보 담론이 전혀 공략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그러한 소설과 에세이를 읽는 독자들의 상당수는 정치의식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결국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이냐다. 140-141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른 차원이다
자신이 포함될 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게다. 이들에게 [88만원 세대] 담론은 벗어날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체념하고 위로하는 것이 빠르다. ....현실을 비참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특권이라는 사실을 장기하 현상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말은 그 특권을 진짜 특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비참함은 특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가짜 비참함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의 비참함이니 말이다. 154
루저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고 고작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들만으로도 사회 전체가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를 냉소한다. 시기할 것이 없는 곳에서 냉소는 싹튼다. '젊은이들의 보수화'라는 것도 이런 문맥 위에 있다. '다른 것'을 보여주겠다는 '좌파 어른'들에게 젊은이들이 되묻는다. 세상에 다른 게 어딨냐고......예술계와 사회운동 진영의 현실은 일반 사기업보다 훨씬 더 황폐하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는 중인 이들의 감성이 자본주의 다른 영역에서 살아남는 중인 이들의 감성보다 나을 리가 없는 것이다. 157-158
자기학대, 루저 감성과 정치적인 각성은 다른 문맥에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루저 감성이 정치적인 각성과 자기 학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고 썼다. 하지만 여기서 자기 학대와 루저 감성과 정치적인 각성은 다른 문맥에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기 힘든 사회라면 정치성 역시 바로 그 사실을 지각하는 '냉소'라는 태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장기하나 굽시니스트의 소박한 성공처럼 주류에 대한 부정적인 규정으로서 '나-루저'가 아닌 다양한 루저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 안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서로의 모습을 발견해가는 시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런 시도가 진행될 때에 루저들은 '비참함을 지각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신보다 아래의 '부속품'들의 삶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59-160
세대 담론은 계급 문제가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뺏긴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처음부터 가지고자 욕망하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을 욕망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배운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맨다.......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 누구들의 힘을 합쳐야 이런 문제를 끝낼 수 있나? 세대론이 옳으냐 계급론이 옳으냐와 같은 문제 제기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어떻게'에 대한 이러한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현실'이 바로 우리의 출발점이다. 세대 담론은 계급 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담론이다. 이 '계급의 문제'를 넘어서 '세대 감수성'의 동질감을 통한 연대가 가능할 거라고 역설하지만, 실은 노동계급이 얼마나 가진 것이 없는지를, 그들의 투쟁의 출발선이 얼마나 뒤로 물려져 있고 그래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폭로하는 담론이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본인의 거세당한 욕망을 '권리'로 인지하고, 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현재 투쟁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세상은 지금으로선 하나의 꿈이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고립'은 투쟁의 성공보다 투쟁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세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암울한 결말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가 포기한 부분들, 우리의 몸에서 잘려나간 부분들을 응시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쌍용자동차는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계속해서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투쟁에 나선다면, 노동운동과 젊은 이들은 서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패배할 것이다....집값는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가 지금까지 운용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중산층 자신들의 자녀조차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168
촛불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2008년의 시위가 애도한 것은 '예상되는 미래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점에서 하나의 판타지가 아니겠냐고.. 187
'파편화된 취향과 만성화된 불안의 세대'가 공동체의 정치를 논하려면
'파편화된 취향'의 문제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정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통합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 가능성은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교적 공통적인 조건에 놓인 20대의 삶의 문제를 제시하는 문화 콘텐츠를 통해 20대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진보 진영에서 주시하는 다큐멘터리들, 여성영상집단 '반이다'의 [개청춘]이나 석보경, 장경희, 정동욱의 [방있어요?]같은 것이 하나의 사례일 것이고, 좀 더 대중적인 측면에서 보면 주호민의 [무한동력]이나 [신과함께], 윤태호의 [미생]과 같은 웹툰들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취향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취향들을 소통하게 만들면서 공통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는 주로 패러디의 측면에서 이루어지는데, 여러 취향의 오타쿠들이 즐기는 문화적 콘텐츠를 활용하여 교양만화나 시사만화를 그리는 굽시니스트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기존의 정치-문화 담론 생산자들
이나 기성세대들이 이런 이들의 작업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다. 20대를 투표장으로 끌어내고 싶다면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훨씬 세밀한 접근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20대의 일원으로서 나는 우리 세대를 '파편화된 취향과 만성화된 불안의 세대'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불안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지 규명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치의 미래도 밝지 않다. 193-194
우석훈, 김규항 그리고 진보의 무기력
단병호의 딸이 검사가 되었다고 욕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정치개혁을 위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386세대에 대한 우석훈의 비판과 '진보적 학부모'에 대한 김규항의 비판의 맥락이 바로 그런 지점에 서 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현실 인식과 담론 인식은 언제나 분열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비판'한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그러한 구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무력한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혐오가 곧잘 표출되는 것도 이러한 세태와 관련이 있다. 한국 사회의 생활인들은 이러한 간극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몸'과 '입'이 따로 놀아야 하는 상황에 익숙하다. 반면 지식인들은 미국에서 어쨌네 유럽에서 어쨌네 하면서 제 '입'에 우리의 '몸'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생활인들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 어찌 우스워 보이지 않겠는가?...200
진보에게 필요한 건 집착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재고민
경쟁 관계에서 진보 담론은 '방법론'을 설명해내는 데 종종 실패하곤 했다. 가령 우리가 서울에 있고, 파리로 이동하고 싶을 경우, 중요한 것은 서울에서 파리로 이동할 수 있는 루트가 어떤 것이냐는 것일 게다. 서울을 나갈 수 있는 루트는 몇 개가 있는데, 이 중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한다든지, 현존하는 길을 선택해서 '파리'로 나아갈 수 없다면 저항이 적은 어떤 지점에 새로운 도로를 건설할 것인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 잠간 흥행했던 진보 담론은 이러한 지점을 통째로 소거한 채 그저 우리가 '파리'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을 뿐이다. 진보 담론이나 개혁 정책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결국 '이상향'에 대한 집착을 거두고 한국 사회의 제도나 문화의 맥락 위에서 자신들이 말하는 가치 규정을 실현시키는 방법에 대한 매우 세밀한 고민을 시작해야만 한다. 203
'새로운 세대'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구원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세대 역시 외계에서 온 생물체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밥과 반찬을 먹고 이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몸'집을 불리며 커온 이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몸과 함께 그 몸을 넘어서는 길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