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일상,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민주화 없이, ‘정치’개혁이나 역사의 진보가 가능하겠는가?(...)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 사회와 나는 연속선상의 한몸인데, 어느 지점에서 그 몸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우리 모두의 이중성
한국인들에게는 언제나 ‘나말고 다른’ 한국인들이 문제이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은 없고 ‘다른’ 한국인을 향한 비판만 도처에 넘쳐나는 탓에 때로는 ‘그 많은 문제 있는 한국인들은 다 어디 있단 말인가’ 싶을 정도이다.
- 한국인들이 스스로 이중성을 합리화할 때 쓰는 주된 논리는 “남들 다 그러는데 나만 중뿔나게 원칙 지키다가는 바보가 되거나 손해를 본다”는 경험에 근거한다. 이는 한국사회는 공적 영역의 신뢰도가 매우 낮다는 분석과 상통하는 것으로, 여기에 따르면 이중성은 ‘외부의 통제 불가능한 구조적 상황’으로 말미암은 불가피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 사회가 ‘규범적 원리’에 따라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개인들은 ‘실제로 작동되는 원리’를 좇아 살아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데 있으므로 개인의 책임은 면제, 혹은 합리화된다. 따라서 윤리적 책임감을 느끼기도 어렵다. 실제로 간난신고의 한국 현대사를 생각하면 이중성이 ‘생존을 위한 적응의 결과’라는 논리는 섣불리 비판할 수 없는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195-196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 – 서구에서 유학한 지식인들이 서구 지식인 사회와 한국 지식인 사회를 비교하면서 자주 제기하는 문제인데, 한국사회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념과 삶, 지향하는 가치와 구체적인 일상을 일치시키려는 ‘윤리적 긴장감’이 떨어짐을 비판하는 말이다. (문제제기는 진보진영에서 주로 일어나지만, 보수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한국의 보수 인사들은 ‘국가안보’를 주야장천 부르짖으면서도 자기 자식들은 군대에 잘 안 보낸다.) 193
소수자에 대한 시선
미국과 호주의 장애인 정책을 둘러볼 기회를 가진 박영주씨는 그 두 나라와 우리나라 장애인 정책의 차이를 “우리나라는 아직도 ‘장애극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그 사람들은 장애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요약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재활훈련을 통해 기능을 좀더 정상인에 가깝게 향상시키고, 안마나 침술 같은 직업교육에만 신경을 쓰는데, 그들은 직업교육과 함께 요리와 세탁 등 일상생활을 혼자 힘으로 꾸려갈 수 있도록 하는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특수교육의 가장 큰 궁극적인 목적”은 일반인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더불어 사는 것”인데, 아이들을 “따로 빼내서” 특수학교에 모아놓는 것은 또래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아이들이 “삶을 향유”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볼 때 불편하지 않도록, 또한 “아이들을 화장실까지 실어 날라서 앉혀주는 것에만 목적을 두고”있기 때문에, 장애 학생들을 위해 운영한다는 특수학교가 결과적으로는 특수교육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175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라는 사실로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그냥”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을 대할 때와 같은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와 다른 ‘타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을 향한 귀기울임이 필요한 것이다. 163
우리의 허약한 육체를가리고 있는 의복들, 우리가 쓰는 불충분한 언어들, 우리의 가소로운 관습들,우리의 불완전한 법률들, 우리의 분별없는 견해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불균등하지만 당신이보기에는 똑같은 우리의 처지와 조건들 사이에 놓여 있는 작은 차이들, 즉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을 구별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 볼테르 [관용론]
Larry Flint “그래, 나는 쓰레기다. 나 같은 쓰레기가 보호받는다면 당신들 모두가 보호받을 것이다.” - 미국의 도색잡지 [허슬러]의 발행인으로 ‘표현의 자유’를 놓고 20년 간 법정다툼을 벌였다. [허슬러]는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나 여성운동 그룹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연방대법원에서 승소한 뒤 이렇게 말했다. 154
어떤 사람의 ‘정체성’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맑스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합”이라고까지 말했다. 게이로 소개되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고, 따라서 그만큼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아들’이고, 직종 분류상 ‘영화인’이고, 20대나 40대가 아닌 ‘30대’이고, 서울시의 ‘시민’,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동시에 어떤 신문이나 잡지의 ‘구독자’이고,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유권자’이기도 하고, 어느 정당의 ‘지지자’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복수의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한성호 씨는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이면 가장 먼저 “게이”로 소개된다. 성적 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든 소수자들이 이와같은 방식으로 정체성을 규정당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이 중에서 ‘공유의 범위가 가장 좁은 차이’속에 소수자들의 정체성을 가두는 것이다. 159
권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책임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90년대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환경운동, 정치개혁도 시민의 권리의식에 기대어 성과가 있었다. 이제는 그 권리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서 책임이 필요한데, ‘책임’하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사회와, 공동체와 나와의 올바른 관계가 어떻게 맺어질 것이냐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