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일상,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민주화 없이, ‘정치’개혁이나 역사의 진보가 가능하겠는가?(...)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 사회와나는 연속선상의 한몸인데, 어느 지점에서 그 몸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시민교육 – 우리 시민사회가 사실상의 이행기를 얼마나 치열하게 ‘몸으로’ 겪어내느냐에 따라 시민교육의 수준이 결정될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체제 아래서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사회 전반에 ‘계통발생’된 미시적인 체제들과 행위규범, 습속을 ‘민주주의의 눈’으로 성찰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87년 협약의 ‘공식적 의제’로 등록되지 못했다. 독재정권을 퇴진시켰다는 의미에서 ‘시민’ 혁명이었을 뿐,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민‘혁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시민사회 내부에서 사익과 공익이 충돌하고,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가 경합하며, ‘구체제’의 구조물과 ‘새로운 사회’의 싹이 씨름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이행기’인지도 모른다.138-139
생활조직 속에서의 개혁, 일상 속에서의 개혁은 어떤 점에서는 독재권력을 타도하는 투쟁보다 힘들다. 구속이나 투옥은 없지만, 우리 사회의 비합리적인 습속과 관행에 맞서며 인간적인 갈등을 견뎌내야 한다. 일상의 습속을 거스르는 투쟁은 최루탄 속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투쟁만큼 격렬하지 않지만 결코 그것보다 쉽지 않다. 그것은 다른 마음가지, 다른 능력, 다른 방법론, 다른 어법을 요구한다. - 학생운동에 심정적 동의를 보내는 비율이 1987년에 10명중 8명에서 3.5명으로 줄었다. 정치적 사회적 의제가 관심사의 90%를 차지했는데 2005년 공부, 취직 준비, 인간관계 확대가 관심사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적인 삶의 양식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낸 경험이 없으며 공적가치에 대해서 배우고, 익히고, 느낄 기회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동네정치의 공간에서 인간적 상수로 자리잡고 있지도 못하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도 특수학교가 들어설 때 반대하지만, 자원봉사를 나서게되는 체험은 이해의 폭을 넓혀주며 변화시킨다. 독일에서 공부한 어떤 분은 유치원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반파시즘 교육을 받을 경험을 이야기 한다. 거창한 단어를 쓰지도 않고 일상의 평범한 사례들을 들며 이야기하고, 이 프로그램을 반파시즘 교육에 써달라며 유산을 기부해서 만든 프로그램의 결과였다고 한다. 이론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민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민주시민교육의 구성요소가 크게권리의 요소와 책임의 요소가 있다. 권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책임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90년대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환경운동, 정치개혁도 시민의 권리의식에 기대어 성과가 있었다. 이제는 그 권리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서 책임이 필요한데, ‘책임’하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사회와, 공동체와 나와의 올바른 관계가 어떻게 맺어질 것이냐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 논평과 성명서식, 칼럼식은 한계가 있다. 대신에 사람들한테 관심 가지고 “그래, 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것 좋은데 혹시 이런 것은 생각해봤니?”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국가에 요구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시민사회 스스로가 ’성취‘해야 할 과제이다. 149-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