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뮌주의는 위계적인 자본제 사회 전반을 비판한다. 그것은 정치와 경제 모두를 바꾸고자 한다. 코뮌주의의 목표는 경제의 국유화냐 아니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유지냐에 있지 않다. 그것의 목표는 경제를 자치체의 통제 아래 두는 데 있다. 코뮌주의는 생산수단을 자치체의 생존과 지속의 한 방편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모든 생산 기업에 대한 권한은 지역 의회가 갖는다. 그리고 지역 의회는 공동체 전체의 이해관계 충족을 위해 생산 기업이 맡아야 할 역할을 결정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 만연한, 삶과 노동의 분리는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의 다양한 욕망과 욕구가 상실되지 않고, 생산 과정에서도 예술적 창조의 도전이 이루어지며, 생산이 제반 사상과 자기정체성의 확립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고든 차일드가 신석기 시대 말기 도시 형성에 관해 쓴 글의 제목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Humanity makes itself." 그리고 인간이 자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지적 발전, 심미적 발전일 뿐 아니라, 욕구의 확대를 통해서, 또 욕구충족을 위한 생산 방법의 확대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잠재력과 그 실현을 확인하는 것은 창조적이고 유용한 활동을 통해서다."(머레이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에서)
북친씨! 말씀을 따라가다보니 러셀씨와 겹친네요. 이렇게 마음도 바투 계시는군요. 자신의 잠재력를 실현하고 삶과 노동의 분리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에요. 코뮌주의는 경제적 해결만이 아니라 정치적 해결을 동시에 바란다고 했죠. 경제가 정치를 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치체의 통제 아래 두는데 있다구요. 러셀씨의 생산자조합주의와도 맞닿아있는 듯 보입니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시스템은 살아가는 것, 스스로 열정을 확인하고 설레임을 있도록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들어오네요. 그 과정은 지적발전 뿐만 아니라 심미적, 욕구의 확대와 욕구충족을 위한 방법의 공진화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네요.
"코뮌주의의 삶이 실현되면 기존의 경제학은 윤리학으로 바뀐다. 기존의 경제학이 가격 문제와 희소자원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윤리학은 인간의 욕구를 실현하는 일, 좋은 삶을 추구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물질욕과 이기주의 대신에 사람들 사이의 연대, 그리스어로 표현하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philia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경제학이 손아귀에 들어오고, 최적의 삶이 먼 일만은 아니겠죠. 그래서 당신은 풍요의 경제학이라고 했죠. 정치와 경제, 그리고 권한에 적절하게 조율하는 과학기술들이 조화롭게 조응한다는 조건을 곁들인 거구요. 그 바탕으로 좀더 좋은 삶을 추구하는 일에 신경쓸 수밖에 없다라고 하시네요. 하고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하는 것의 간극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시는군요. 북친씨! 귀가 간지럽지 않으신가요? 너무 낭만적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낭만적이라 주장하는 이유를 되어 보시라 말하는군요. 북친씨가 만들어 놓은 그물에 그물코들은 좀더 생생하게 상황을 넣고 시도 해볼 수 있다. 낭만이라고 하는 것이 질문자의 선입견이, 주장의 축이 과도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그 주장을 그물코들은 대위해서 서로 견주어도 좋다고 말씀하시는건가요. 어떻게 보면 북친씨가 말한 역사적 경험들을 이론과 사상에 반추를 적게하거나 안하거나 다르게 견주어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싶네요.
지금까지 사상과 이론은 완결성에 집착해서 다른 이론과 사상에 열어두지를 못한 거죠. 그저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 했던 것은 아닐까요? 미처 생각지 못한 z축의 요소와 허수의 축도 만드는 과감함도 필요한 때는 아닐까요? 좀더 현실을 입체적이고 서로서로 간섭을 미치고 구체적인 삶에 잔잔함이 스며드는 이론과 사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제넘게 선을 넘은게죠. 그래요. 생각의 삼팔선, 생각의 휴전선을 넘어, 너머 봐야죠. 인류가 걷던 길들 이유가 있었던게죠. 귤화위지만 되지 않은다면 말입니다. 여전히 끝까지 겉넘는군요.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