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급변하는 사회이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모순의 양상은 그 태동부터 지금까지 그리 변하지 않은 듯 하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주름잡는 질서가 되었지만, 한나 아렌트가 이미 오래 전 이 문제를 꿰뚫어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예가 아닐까 싶다.


한 때 그녀는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현학적이다 못해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하이데거의 학풍은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색채를 정치적 사유의 영역에 도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글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독특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유태인이었고 보다 많은 폭력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가 자본주의 사회, 인간이 지닌 폭력이라는 문제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떤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 시장만을 위한 시장. 그 안에는 인간이 설 곳이 없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노동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성함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에 의해 속박 당하는 주객전도의 아픔을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의 존재 기반을 튼튼하게 해주는 다원주의가 부정되던 순간부터 인간은 이 사회의 주체 아닌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성시된 노동은 너무도 과대 포장(?)된 나머지 결국 인간이 주관할 수 없는 영역의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고, 자본주의는 생산성 향상에 끊임없이 목 말라 한 나머지 무의미한 생산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은 인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없었다. 그것은 보다 빠른 속도의 생산을 감당해낼 수 있는 기계화된 인간을 요구하였고, 어느 순간 인간은 기기로 대체되어갔다. 그렇게 인간과 노동은 분리되었으며, 이는 인간 실존의 조건인 생명, 세계성, 다원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생산의 비인간화. 그 안에는 지난 20세기 인류를 떨게 만들었던 전체주의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생산 주체 간의, 더 나아가 모든 인류 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재는 자연적으로 모든 가능성의 부재로 이어졌다. 인간은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의문시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요구하기 때문에 하는 단순 행위들의 결합 속에서 인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법을 잊었고, 세상에 저항하는 방법을 잃었다. 무조건적인 추앙, 반대파에 대한 폭력 속에서 단 하나의 질서만이 의심 받지 않는 것으로 절대화될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을 비롯,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독재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지금껏 인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어두운 면모에 너무도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에겐 희망이 없음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실제로 힘의 논리에 의해 우리 사회는 운영되고 있으며, 권력을 소유한 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의, 그렇지 않은 자의 행위를 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힘마저도 소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악을 탄생시킬 수 있었듯, 선 역시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력을 지닌 존재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아직 현실화되고 있지 못한 한나 아렌트의 긍정적 태도가 언젠가는 실현될 날이 오지 않을까?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으며,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혜를 획득하는 그 날을 기다리기에는 나의 삶이 너무도 짧은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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