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고 더 시끄러운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가?

 

자본가의 끝이 우리 모두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거 아르헨티나의 국가부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자본의 교환가치가 중단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이 등장했다. 자본주의가 무너진다고 해서 우리 삶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중요하다. 국가 부도가 우리 삶의 부도는 아니다.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자본이 우리 삶을 소외시키는 소비자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서 자본을 소외시키는 삶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159

 

 

안철수란 달콤한 사탕

 

대중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은 자본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증상을 즐기는 주체는 증상을 없애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증상에서 계속 즐거움을 얻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쾌락의 평등주의는 이런 심리에서 구조화한다. 지속 가능한 쾌락의 평등주의에 대한 요구가 안철수 현상을 가능하게 만든 원인인 것이다.(중략)

 

안철수에 대한 지지는 주권에 대한 요구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논리를 되풀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주체화한 '표준시민'이 대중의 욕망으로 흘러넘쳐 과잉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성 정당 정치의 한계를 비판하는 측면도 내포한다. 안철수 현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따라서 안철수라는 개인에 대한 지지 표명이라기보다, 이를 통해서 표출되는 기성 정당 정치에 대한 부정이다. (중략)

 

안철수 현상의 배후에 드리워져 있는 것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그렇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안철수 현상을 통해 대중이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즐거움을 부여한 질서를 유지해달라는 것이다. 안철수라는 멘토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은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50-152

 

안철수 현상을 문화적인 것이라고 파악한다는 것은, 안철수를 둘러싼 모순적 상황 자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대중이 위험한 정치를 요구하면서 안전한 안철수를 선택하는 모순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정치는 세상의 질서를 바꾼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인데, 안철수라는 안전한 개인을 통해 이것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것이다. 자기 삶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해가기보다, 안철수라는 '좀더 합리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이성을 기탁해버리고자 하는 현상이 곧 안철수 신드롬의 본질인 것이다.  149

 

안철수 현상은 기존에 한국 사회에서 되풀이해서 나타났던 메커니즘의 반복처럼 보인다. 자신보다 더 높은 합리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에게 자신의 합리성을 교정해주기 바라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태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대중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긴 하지만, 자유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정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149-150

 

 

쾌락의 평등주의

 

소비자 주권의 평등, 쾌락의 평등주의는 '평등의 고원'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와 시민 사이를 구분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나누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쾌락의 평등주의이다. 고원은 일정한 높이를 전제한다. 그 높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주변은 고원의 평등주의에서 배제된다. 솟아오른 고원의 평등에 집착하면서도, 주변과 고원 사이에 조성되어 있는 근본적인 불평등에 대해 눈 감는 것이 바로 쾌락이 평등주의이다.

 

 이 평등주의는 부단한 자기계발을 통해 고원에 올라올 것을 주문한다. 고원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개인은 하나의 시민으로 주권을 획득한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는 주권에 대한 요구로부터 더 나아가 주권과 자유의 분리를 도모하는 것이다. 주권과는 다른 자유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요구이고, 이를 통해서 급진적인 정치가 발생한다.

 

 

  뱀발. 1. 두 책의 이택광 문화비평가의 글을 본다. 중간계급이 갖는 합리성이나 정치적 긍정성이란 부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권일이 얘기한 '표준시민'은 그 속성상 자기계발과 성공이 내면화된 존재이다. 국가와 정부, 정치에 대한 역할을 하지만, 기본적인 한계는 자본주의에 착근한 소비자로서 주권, 그 소비자 민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그런 존재의 시선은 정상적인 질서와 안전을 요구하는 수준이지, 노동자, 비정규직 이땅의 루저를 삶의 동반자로 살펴볼 수 있는 안목자체가 없다는 점에서 삶의 민주주의로 전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에 실망하고, 이명박에 열광하던 이들이 그들이라는 것, 자본주의의 정상성 회복에 대한 열망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이다라고 한다.

 

3. 소비자민주주의 확 다가서지 않아 재질문을 해본다. ' 소비자 민주주의가 공공성의 영역에 관심이 없고 사적인 공간으로 획일화한다고 했는데, 현재 대중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소비자로서 요구를 하고 고객으로서 만족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공적인 문제점은 남는다고 여기는 것인가? 예를들면 돈이없고, 성공할 실력이 없는 존재는 여전히 그대로인 상황에서 개선의 여지가 없는데, 이런 부분은 보이지도 않고 드러날 수도 없다는 얘기인가? 소비자의 시선에 팔할의 그들의 권리나 삶의 개선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얘기인가? 이렇게 소비자에 꽂히는 민주주의라면 정치의 기능을 정상적 시장기능의 회복정도로만 여길 수 있다는 점인가? 시장에 만족할 뿐, 본질적인 사회란 접점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입문이 왜곡될 소지가 큰 것이 장점이자 한계라는 것인가?'

 

4. 문재인이란 달콤한 사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행여 오해 마시라. 자유는 떨어지지는 않는다. 심거나 만들거나 키우거나 이다. 사람들이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지금 그자리이다. 정치가 정말 필요한 시점이다. 저기로 제대로 가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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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40522
    from 木筆 2014-05-23 12:12 
    1. 정몽준지지자를 발견하다. 박원순은 왜 싫은게 아니다. 주는게 없이 미운거다. 반값 대학교 무상급식 그냥 싫다.고 솔직해서 고마웠다. 40대후반 50대초반. 그냥 좋거나 싫다. 우리 정치의 수준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힌다. 합리적 보수의 수준이 여기다. 아니 양심적인 새누리지지자 여기까지인가. 무상급식도 세금 돌려막기라고 ᆞᆞ 세월호로 바뀌지 않는다. 속내까지 ᆞᆞ ᆞ 박원순 고맙다 잘해라. 투표로 지지자를 바꿀 수 없다. 투표라도 하지 않으면 고맙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