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사랑]  삶이 지랄같으면 바꾸자

 -   분권, 연대 그리고 운동 그 찌질함을 위한 色주

 

분권의 경계를 새로 만들자

 

도시라는 공간에서 적정한 분권의 인구는 얼마일까? 중세시대를 예로 들거나 자급자족의 단위, 아니 기본적인 시스템에 역사적 답을 찾는 시도는 그리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건과 조건이 다르므로 그 규모를 일부러 가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역사의 측면을 감안하여 분권의 의미를 찾는 것은 합당하다. 물론 역사 속에서 인물, 먹을거리, 축제, 스토리가 있는 꺼리를 찾아내는 것은 단순히 점과 점이 대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구조 속에서 마을 속에서 나를 위치지음으로서 의미의 뿌리를 내리게 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이런 역사와 분권을 지금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노력과 다른 면을 더듬어 보자. 이성과 설득의 언어구조에 갇혀있지 않고, 욕망과 쾌락,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말들, 육화된 감각의 말들을 열어제껴보자. 최근에 인문의 경지에 물오는 슬로건을 보자. "배워서 남주자"  말의 결에 욕망과 쾌락 양념으로 육화시켜보자. "배워서 남주자 -> 배워서 자랑하자-> 배워서 잘난척하자."  배우는 것에 의무감이나 당연함이 스며있고 어쩔 수 없은 강박증, 앎이 의무란 더깨를 씌우는 남을 줘야한다는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보자. 알려주고 싶어 입이 방정맞게 근질거리고, 알고 싶어 안달나는 "자랑하자"가 더 나을 것이다.

 

조금 더 스펙트럼의 보라색 쪽으로 가보자. "잘난척해보자!!". 잘난척하지 못하면 안되는 분위기. 한판 겨룰 수밖에 없는 분위기, 뭔가 일어날 수밖에 없어 싸움구경을 해야되는 정적. "배워서 잘난 척 해보자"  알려줄 수 있는 곳은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잠시의 시간이라도 더 주고 싶다. 이것이 할 수밖에 없거나 더 알려주기 위해 갈고닦는 익숙함의 경지라면 어떨까? 배워서 남을 주어야 한다보다 배워서 잘난척하자가 더  앎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육화된 말이자 사건을 벌리려 안달난 자세이다. 움직이고 싶어 죽겠다 싶다.

 

이성과 설득의 언어에 족쇄처럼 걸려있지말고, 쾌락과 욕망을 자극하는 몸말,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육화된 언어의 결은 없는 것일까? 밥, 욕, 몸, 똥, 뼈. 숨. 뱀. 입, 코, 귀....마음과 몸을 연동시키는 살아있는 말들. 이성과 설득의 언어를 옆으로 지긋이 물려두고, 뭔가 움직이고 싶어 꼬물거리는 감각을 되살려보자. 마음이 움직이고 몸을 끄는 여운이 있는 감성이 배여있는 말들의 분위기로 고양시켜보면 어떠할까?

 

(삶이) 지랄같으면 오라.
 - 지금 여기 진보를 논할꺼다.

 

분권의 마지노선을 어디로 잡을 수 있을까? 20-30만정도의 구단위가 좋을까? 몇개의 일상이 겹치는 동단위가 좋을까? 조례로 통해 준강제성을 주거나,  일상의 독특한 경계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의 단위는 어디까지일까? 동단위가 될수도 있고, 면단위가 될 수도 있다. 몇개의 동이 될 수도 있고, 구가 될 수도 있다. 몇개의 구가 될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다.  얼마나 색다를 수 있을까? 정치를 고려한 기획으로 교육시키고 설득시키는 구조, 지난 과거의 시간을 겨워내는 작업으로 달라지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살펴야할 직설로 나아가는 분권의 싹은 없을까? 일상과 삶을 달리보게 만드는 방법은 없는가? 삶은 계란, 삶은 라면, 아니 삶의 정면 승부수는 무엇일까? 음식점은 라면으로 계란섞인 라면으로도 분권의 자장을 만들어낸다. 분권은 이 지긋지긋한 삶에 균열의 한방을 먹일 수 없는가?

 

당분간 지극히 이성적인 얘기만 하자. 아직 상상력도 온몸으로 부여안을 수 있는 사랑력이 내겐 없다. 경험의 밑천이 일천하므로 말이다. 말들이 이 언어에 사로 잡혀있다. 어떤  마을사람들은 어떻게든 노인1인가족에게의 삶의 뒤안길은 없다. 이 동네에서 살면 어쨌든 굶지 않아 외롭지 않아 자살을 염두에 둘 걱정이 없는 곳이 있다고 하자. 삶과 사회적 관계망이란 문화자산의 비용이 얼마나 소요될까? 공통되는 자산이 아니라 실생활에 스며드는 곳이 이땅위에 있는 마을이 있을까? 이사가고 싶은 곳이 있는가? 남쪽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이 동네는 미국산쇠고기 매장이 시민 합의되어 성문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장벽이 있어 장사를 암묵적으로 할 수 없다거나, 최소한의 광우병사전검역시스템이 되어있다. 안전하다. 이런 안전의 분권이 리, 면, 동, 구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다양성, 탑다운이 아니라 바텀업, 분권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시를 설계하는데 있어 사람, 문화, 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본다고 하자. 사람은 자본가나 건축주의 입장만이 아니라 입주자는 물론 보행자와 자전거라는 시각으로 설계 포인트를 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노인의 관점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라는 스펙트럼아래 교육기관은 학생을 주체로 세워 보는 일, 여성이자 주부의 관점에서 살피는 일, 차상위계층이나 계급의 관점에서 기본계획을 입체적인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택시와 자가용, 물주의 흐름에 내맡겨져 있다.

 

지금 여기 도시공간들은 시간이 없는 것처럼 움직인다. 역사의 자장이나 문화의 생성, 미래세대에 대한 의식이라는 시간의 감이 부재하다.  독특함도 부족하고 스토리도 없는 천편일률적인 축제와 마을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공간만 돈과 행정에 사로잡혀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지, 시공간으로 번지거나 뿌리내리는 기획이 없다. 역사와 문화, 삶의 자장을 새롭게 만드려고 하는 기획의 연결망과 곰삭일 수 있는 장조차 없다. 시민은 여전히 행정의 대상이자 일을 관철시켜야 하는 절차상의 인물들일 뿐이다.

 

도시, 시공간, 신시공간, 색다름, 운동

 

시민단체는 관과 대응하는 국면에서 여전히 이성적이다. 설득해야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벌어지고 있는 문화적 시공간의 단절을 보자. 중앙데파트나 홍명상가가 TNT에 헐리우는  신목척교의 탄생을 보자. 신설과 함께 사위워가는 공간을 멀뚱히 바라보며 무얼했는가? 그저 혼자의 맘 속으로 가져가게만 한다. 물리적인 공간이 사라지는 사건에도 도시의 익명성은 애절하지 못하다. 마을 동네 어귀를 지키는 나무만큼이다. 그 시공간을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줌에도, 절연의  의식마저 담지 못하고 있다. 기다란 여운이나 일상의 공간은 관철이냐 비관철이냐는 이성적이고 설득적인 측면만을 협공하고 있다. 사람들의 감성적이고 일상의 여운을 끄는 시공간에 대한 감흥을 증폭시킬 노력은 전무하다.

 

사람들이 투쟁이 성과만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앎이 많다. 납득을 넘어서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서의 물꼬를 터뜨리는 일.  공유정서의 샘물점을 만드는 일 역시 논리적 측면과 이러저러니 합당하다는 산술만이 정답이 아니다. 그저 문화 공연을 한판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온도를 올리고 공명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이 아쉽다. 

 

사람들은 일인일색이 아니다. 비대칭적인 공간이 스스로 존재한다. 상황에 맞춰 다면적인 모습은 누구에게나 볼 수 있다. 일인다색의 시대다. 개인은 상황에 맞춰 응집하고 폭발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너무도 많은 상황과 대면할 수밖에 없기에 다중과 다면의 일상을 겪고 만들어간다. 정서적, 논리적 교감은 전혀 다른 결로 만나고 꽃피우고 지기를 되풀이한다. 계층과 계급의 결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결만 보면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사이사이 피고지는 다른 색깔과 함께 연동하는 감성의 숨결과 정서를 읽자. 그 꽃같은 숨이 트이는 자장을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시공간. 새로운 돌발의 연대

 

모시인은 자신을 움직은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 한다. 사람은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팔할은. 사람을 움직이는 팔할은 쾌락과 충동, 그리고 욕망이다. 움직이게 하고 끌리게 하는 느낌의 뿌리는 설득과 권면에 있지 않다. 논리는 그 움직임에 대한 충동, 깨달음, 느낌의 종속변수다. 움직임에 뒤따라오는 그림자이다. 그 사후적인 성격인 이성의 그림자는 충동과 쾌락의 단절을 이어주는 도구이며 보존과 방부의 효과만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성과 설득은 보수적이며 지금이하이다. 지금이상은 여전히 욕망과 충동, 쾌락을 바탕으로 삶과 일상의 행동을 부추기고 꾄다.  지금으로부터 시공간은 뫔의 말로 열며, 뫔의 자극으로 생긴다.

 

이렇게 새로운 일상의 시공간이 생기고 자랄 수 있다. 새로운 말의 그물로 새로운 욕망이 생성되며, 새로운 쾌락과 충만이 출현한다.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방법, 삶의 뿌리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사랑은 분권의 씨앗으로 흔적을 남긴다. 씨앗은 이성과 설득과 권면으로 싹을 틔우지 못한다. 씨앗은 당신을 근질거리게 하는 쾌락과 욕망, 끌림과 설레임과 한통속일게다. 아마 당신이 분권주의자라면 말이다. 새로운 정치를 지향한다면, 새로운 일상을 꿈꾼다면, 새로운 마을을 꿈꾸어 왔다면 이성과 설득을 지금 멈춰보자. 세끼 먹거나 한끼 먹는 음식의 말로 단련해보자. 일상과 너-나와 주변을 색안경을 끼고 보자.

 

뱀발. 키워드로 보는 대전에 대한 강연, 명절 전후로 이어진 진보와 지역정치, 책이야기들이 섞인다. 남겨두지 않으면 잊혀질 듯싶어 성글게 쓴다. 유행을 넘어, 유행을 너머, 우리는 어느 작은 곳에서라도 시작할 수 없을까? 병행할 수 없을까? 왜, 여전히 휩쓸려다니기만 하는 것일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603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65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