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가 말한 쇠로된 울타리, 루쉰이 말한 쇠감옥으로 비유된 자본주의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는다. 그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주눅들지 않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땅속에 잠자고 있던 공룡시대의 화석연료라는 명망을 불과 200∼300년만에 바닥을 드러내놓는다. 철도와 도로, 도시를 반복해서 만들어 놓았다. 경쟁과 기업에 인격을 부여한 뒤, 자본의 성장에 필요한 것만 삼켜먹는 과학의 힘에 근거해 선형 발전을 이루어놓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여전히 돈은 돈을 삼키고, 기술은 기술을 삼키고 불린 배는 가장 강한 적자 하나만 남겨놓는다. 여전히 태양은 둘이 필요없다. 자본주의는 여전한데 국가는 한 하늘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가 두 개가 아닌 이상, 세상이 두 곳이 아닌 이상, 지구가 더워져도, 국가는 상황에 밀려도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가뭄과 홍수, 폭염과 한파, 양극화된 기후는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이들에게 더 비참하고 참혹하다. 석유정점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다른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 절반의 굶주림과 절반의 삶에 대해 별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국가라는 장벽은 견고하게 무책임하다. 타국의 다른 삶에 도의적 관심을 기울일뿐 제도적 관심은 없다. 그 와중에 과학은 세상을 하나의 구역으로 묶었다. 경제적인 세계화로 우리는 오대양육대주의 모든 먹을 것을 나누고 이동시킬 수 있다. 돈이 있다는 전제하에 먹고 살만한 정도만 세계화되어 있다. 과학은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돈과 성장이란 이름표를 붙인 자본에 철저히 복무한 것은 아닌가? 2∼300년 화석연료로 우린 100억명도 더 먹여살릴 제화를 생산해놓고 있다. 정치적으로 세계화가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궁무진한 도시와 에너지와 절반의 풍요를 한편으로 다른 한쪽은 절반의 가난이란 선물을 보란 듯이 펼쳐보인다. 세상은 더워질만큼 더워졌다.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
스마트폰, SNS, 나로호, 과학벨트, 기초과학자없는 과학, 비정규직으로 넘치는 연구소. 문과 그리고 이과.
지금 여기 과학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 휴전선으로 나뉘어진 분단국가처럼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나이에 이과생은 더 이상 역사를 공부할 이유가 없다. 문과생은 더 이상 수학과 과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아야 한다. 문과이므로 기술에 가린 사람들의 고생과 어려움은 뒤로 숨는다. 이 기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플지 생각하지 않는다. 연구하지 않는다. 돈이 되어야 하므로, 문과생은 기술적 어려움과 곤란과 세세함을 헤아릴 엄두도 내지 않는다. 줄이고 많이 벌어야 하므로 그깟 고생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과학발전에 대한 과도한 낙관이 만연해서, 과학자는 사회가 과학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다고 불만이 많고, 시민들은 과학기술이 낳은 위험들에 그대로 노출된다. 사회와 과학기술을 관통하는 어떤 노력도 부재한 상황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취약성이 커지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에서 시도 사람의 무늬를 구별해낼 수 없다. 방정식이 시어처럼 얼마나 정갈한지 느낄 수 없다. 불쑥 튀어오르는 것이라고는 로또같은 대박이란 신화만이 있다. 석유화학공업에 나랏돈을 투자하고, 원자력발전에 지원하고, 우주과학처럼 저기 중앙집중적이고 거대한 과학만이 있다. 황우석에 취하고, 디워에 허우적거린다. 과학에 민족이란 자긍심의 외피를 씌워 중심을 잃게 만든다. 무엇인가 해결해줄 구세주처럼 필요할 때만 섬긴다.
대중화에 대한 과도한 관심, 순환 인식의 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