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간 아우또노미아총서 3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정남영 옮김 / 갈무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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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유물론이라는 이름과 관련ㄴ하여 가장 주목할 것은 물질 개념의 재정의이다. 유물론(materialism)이라는 이름은 물질 개념의 중심성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의 물질 개념의 혁신성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시간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 단순한 시간성이 아니라 창조의 시간성이다. 물질은 카이로스('시간의 화살'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에 의하여 매 순간 측정불가능하게 되고 매 순간 새로 창조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물질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일정한 법칙에 종속되어 운동하며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새로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이다.-263쪽

맑스 이후 후퇴한 유물론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물질의 운동'이 아니라 '물질의 생산성'이라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물질이 그 자체로 생산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유물론이 혁명의 철학 즉 새로움의 발생을 말하는 철학이 될 수 있겠는가?-시간의 테마만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네그리의 탐구는, 맑스가 서양의 전통적 시간관(공간화된 시간)을 극복하고, 사건들이 순서를 지어 발생하는 매체로서의 시간(뉴튼,칸트,헤겔의 시간관)과 척도로서의 시간(자본의 시간, 실질적 포섭 이전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존재 전체의 짜임새가 되는 시간(실질적 포섭의 시간)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서 시작한다.-265쪽

유물론적 장은 정태적으로 파악된 물지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구 사회주의권의 철학인 맑스레닌주의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바로 이 정태적 물질 개념의 사례이다. 맑스레닌주의는 '물질의 자기운동'이라는 마로 물질이 그 외부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명시함으로써 유물론의 외양을 갖추려고 애썼으나 막상 물질 개념을 정의할 때에는 그로부터 창조적 활동성을 제거함으로서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이 자가당착은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가 자연과학에서 처한 운명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271쪽

네그리의 재구성된 유물론에서는 물질과 의식, 주관과 객관의 괴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바로 '몸'개념이다. 카이로스(시간)가 곧 물질을 구성하는데, 바로 카이로스의 육화가 '몸'이기 대문이다. '몸'개념은 '물질의 자기운동'이 처한 아포리아를 돌파하여 '물질의 자기생산'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몸'은 사유의 능력과 동시에 변신의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변신이란 새로운 존재를 창출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성하는, 항상 특이한 이행이다. 이러한 '몸'들의 집합이 바로 존재가 생산되는 '유물론적 장'인 것이다.-272쪽

유물론적 장에서는 진리의 문제가-실천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천할 문제라는 의미에서-그 자체로 실천의 문제가 된다. 이것을 네그리는 (맑스를 따라서) '진리의 프락시스'라고 부른다. 이제 진리는 존재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이다. 그리고 매 순간 존재가 혁신되면서 진리 역시 혁신된다. "진리는 그날그날을 살아간다" 매순간 전과 다르게 살기, 항상 새롭게 살기, 모두 함께 그렇게 하기-이것이 바로 공통적인 것의 목적론이 내세우는 '삶정치'적 구호이다.(281)-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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