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과정으로서 몸 

 

95  동아시아인의 몸은 몸뚱이의 속성과 옷의 속성을 함께 갖는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 몸뚱이는 마음(心)을 담고 잇고, 옷은 몸뚱이를 담고 있다. 따라서 몸은 마음과 몸뚱이와 옷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 동아시아인들은 물질적 몸에 독립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항상 주변 상황-그것이 의복이든 도덕적 정치적 규범이든 관계없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라보았다. 서구적 의미의 몸과 마음의 분리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87 역사적으로 서양의 의학이 규정해왔던 몸은 고대 자연철학에 의해 제시된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출발했다. 이 중에서 교조적 학설인 사체액설이 정설로 굳어지면서 중세 1500년의 정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르네상스의 새로움과 계몽주의의 합리적 분위기를 통해 우리의 몸은 기계로 분리, 환원된다.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면서 기계로서의 몸에 대한 조작의 기술이 증폭되는 과정을 거쳐,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환원의 전략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태동하면서 생성과 과정으로서의 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탄생하게 된다.

 

 

유두 - 수태한 어미가 아이를 상상하며 쓰는 수양록은 인류사를 통틀어 같은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리듬과 운율을 가진 시이다. ...만일 시의 숭고성이 있다면 회임한 수태의 리듬을 닿아 있을 가능성이 큰 이유는, "자신을 스스로 해체하고 또다른 육체를 구성할 수 있는 육체"가 여성의 몸 안에 암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재不在가 아닌 무 無로서 모든 시가 회임 懷姙하고 있는 진실성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라는 엄청난 사건과 숨결이 흩어져 있다.  193

 

 

문학

 

46 묵시록은 문학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톡특한 장르다. 문학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한다는 전제가 처음부터 유기체적 환상일 뿐이며, 내용과 형식의 일치 또한 작품의 완성도와는 상관없는 말이다.

 

50 역사의 종말, 이데올로기의 종말은 억눌린 자들이 상상하고 염원하는 진정한 종말, 즉 해방과 새로운 천년왕국에 대한 급진적 상상력을 봉쇄하는 전략이다. 지금 우리는 종말 없는 종말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종말 없는 종말을 끝내는 상상력, 종말에 대한 거듭제곱의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아닐까?...오늘날 세계 종말의 이미지는 어디에서나 존재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묵시록적 상상력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23 '무엇을 할 것인가.' 현재=미래라는 등식뿐 아니라, 현재=/=미래의 상상력의 기어변속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미래를 지금처럼 얼어붙은 현재로 연장하려는 시장주의자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국가주의자들이 있는 한, 얼어붙은 미래를 가르는 '도끼날'(프란츠 카프카)의 상상력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이러한데, 파괴와 생성의 묵시록적 상상력을 요청하는 일이 어떻게 작가와 문학만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뱀발. 책들을 다시 펼친다. 프란츠 카프카, 루쉰의 절망의 끝은 어디였을까? 카프카와 루쉰이 지금을 견뎌낸다면 어떻게 지금을 볼까? 답은 간단할지 모르겠다. 관료시스템의 끝과 철로된 갇힌 방밖의 현실이 너무도 자명해서, 고민을 애써 담으려 하지 않을 것 같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절망의 순간, 시인과 작가는 자신의 길을 간다. 세상은 늘 알아주지 않는다. 앞선 이들도 그러했고, 그 여운들만이 앞선이들의 그늘을 다시 호명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섬주섬 챙겨 책사이로 왔다갔다 한다. 몸의 연대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대의 전사들이 정말 많다 싶다. 얼마나 외로울까 싶다.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가는 자라는 말처럼 제도 안이 끊임없이 뱉어내는 이들의 헌신과 노력, 슬픔을 마음에 넣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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