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잠을 자도 영 개운치 않다. 지난 꿈결에 세포가 그려진 책들 사이로 분석적인 방법은 더 이상 안된다며 책장을 넘긴다. 넘긴 책갈피 사이로 이제는 통으로 사고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강변한다. 이것이 맞다고 말이다. 그리고 미니의 아픔이 스며든다. 면역치료가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일터의 습속 아니 관행과 지금 문제되고 있는 일들사이로 몇통의 전화가 꿈에서 생각으로 번져있다.
여성되기
실뿌리처럼, 아니 검은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일상. 집안일이 몸에 각인된 그(녀)와 아이들의 동선이 붙어있는 그(녀), 그 몸으로 세상을 겪는 일, 그 아픔사이로 보는 시선이 남과 녀의 차이를 말해준다. 난 한번도 여성이 되어본 적이 없다. 머리만 척일뿐, 나의 일상에 살림과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퇴근을 서둘러야 되는 이유를 몸으로 삭여본 적이 없다. 이차, 삼차에서 결정되는 뒷거래들로 소외감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물매를 넘어서는 사람들이 늘수록 삶터와 일터에 균열이 생긴다. 허울뿐인 제도의 선언문은 아무 쓸모없다. 바쁘고, 일은 많아지고, 남자들만의 순환구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수다의 동선, 몸의 동선과 남자들이 여성을 차별하는 얇은 피막에서 새로운 싹이 자란다. 남성들의 여성되기가 공감과 함께 남성-여성사이로 향하는 장이 된다. 그 찰라의 통증을 발화 공감하는 일.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 남성의 입과 몸으로 끌고나가는 일이 현실을 월담하게 하는 지렛대가 된다.
아이되기
송년모임에 온 네살박이 예원이는 낯을 가린다. 엄마 뒤를 쭈빗쭈빗 마음을 열지 않는다. 중학생 언니가 몇번 만지려하지만 여전히 눈빛을 마주치지 않는다. 삼십분, 한시간 아이들도 모이고, 놀이로 땀이 배일 만큼 너-나가 없다. 언니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 이제 그림자처럼 아이들과 아이들사이를 따라다닌다. 밤이 깊다. 이제 헤어질 시간. 아이는 양말을 신으려하지 않는다. 이미 이 공간은 아이 것이다. 그 숨결과 재미를 지금 떼어놓을 수 없다. 이 공간은 이미 아이 것이다. 하나 둘 어른 식구들은 헤어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예원이는 언니의 다짐과 약속을 받아들인다. 이 정든 곳, 내일 꼬옥 다시 올 것이라고 약속한다. 즐거움이 몸에 배인 이곳을 찾을 수 있다고... ...
놀고 웃고, 아픔을 몸에 접붙이는 일들. 설움과 설레임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는 일들. 뜨거움과 놀라움을 가슴으로만 가져가지 않는 일들. 세상은 내 몸안에서 다시 이해되고, 받아들이고 걷고, 다시 보고, 다시 머리로 가져가는 일들. 그 순환고리 가운데 나는 너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아주 조금 너가 된다. 나는 너로 태어난다.
뱀발. 송년모임이 집과 씨앗 두 곳이 겹친다. 일터일을 마치고 청소 겸 집안 정돈, 손님맞을 준비를 하고 저녁식사와 맥주 한잔할 무렵 다른 모임을 다녀오다. 십년정도 차이가 있는 가족단위의 모임인 셈이다. 열가족 이상, 아이들도 나름나름 정신없이 서로 섞인다. 어른들도 어느새 정치학습이 된 것처럼 정권의 부재를 논한다. 세대의 단절과 sns의 파급효과를 말한다. 상상잡지를 한권씩 건넨다. 마음을 부여잡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