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자연을 인간 경제생활의 척도로 받아들이면 자유로움이 절로 이루어진다. 자연과 경제가 다시 만나면 그만큼 민주주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경제도 자연도 추상적으로 운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척도로 삼을 때, 우리에게는 지역 차원의 현명한 방식이 필요해진다. 이를테면 특정 농장을 아무 농장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특정 장소에 대한 특정 지식은 중앙집권적 권력이나 권위의 권한을 벗어난다. 자연, 즉 특정 장소의 본연을 척도로 삼는 농업은 농민이 잘 알고 사랑하는 농장을, 잘 알고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농장을, 잘 알고 사랑하는 이웃과 더불어 잘 알고 사랑하는 연장과 방법을 사용하여 돌봐야 함을 뜻한다.

 

단락꼬리 - 책갈피를 해두었는데, 꽂힌 문구는 자연과 경제가 만나면 그만큼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부분에서다. 민주주의는 늘 염두에 두는 것이지만, 한가지 개념으로만 생각을 하는 습관의 위험함을 되짚고 싶다. 정작 두가지 문구를 동시에 고려하는데 서툴다. 아니 뒤에 언급한 추상화하는데 익숙해서 오히려 관심이 없다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디테일의 힘이라는 것이 거꾸로 추상으로 환원해버리는 버릇이 아니라 하나하나 겹쳐서 깊이 생각해보는 다른 취미가 필요한 듯 싶다. 문득 민주주의란 연습은 개념의 겹침, 혼란스러움 하지만 깊숙이 천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을 이어본다.

 

136 생산성이라는 유일 기준에 따라 이룩된 산업농업은 독백극 연기자나 연설자의 태도로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다루어 왔다. 부탁을 하는 법도, 반응을 듣고자 기다리는 법도 없었다.

 

단락꼬리 - 독백극 연기자나 연설자의 태도로 산업농업을 비유하는 것에 걸렸다. 이어서 이렇게 전체주의적이고 중앙집중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자연을 척도로 삼는 농업과 비교한다. 대화를 즐기는 사람의 태도로 접근하면서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당장 도달하려 하지않고, 여건과 부딪히게 될 곤경을 심각히 염려하는 일부터 한다고 표현한다. 어쩌면 홀로 몸에 배인 것 가운데 하나는 반응을 듣고자 기다리는 것에는 열려있으나 부탁이라는 단어도, 부탁하는 방법도 서투르다. 그래서 움직임은 독백으로 멈추거나 연설자의 마음으로 그쳤던 것은 아닌가 되짚어본다.

 

132-134 오랫동안 우리는 국가 차원에서 땅에다 생산만을, 농민에게도 생산만을 요구해 왔다. 우리는 이렇게 생산만을 강조하는 경제 기준이 좋은 성과를 보장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도가 궁극적으로 참되고 옳다는 것을 밝혀 주리라 믿었다. 경쟁과 혁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제약과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요리조리 다 피해 갈 수 있으리라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버렸다......농업은 생산적이어야 하지만 계속 생산적이기 위해 두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땅을 보존하고 땅의 비옥함과 생태적 건강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땅을 건강하게 이용해야 한다. 또 하나의 요건은 땅을 건강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땅을 잘 알고, 땅을 잘 이용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땅을 잘 이용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 척도로서의 자연, 1989 ]

 

128 여러 일들이 언제나 ‘소비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중개인과 대리인과 검사관이 자꾸 늘어나게 만드는 시스템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소비자는 이 모든 난관을 다 극복하고 어떻게 자신의 취향과 필요를 생산자가 알게끔 할 수 있는가? 소규모 생산자를 망하게 함으로써 생산비가 소매가격을 높이지 않고서는 ‘개선’이라는 것을 할 수 없어 보이는 이 시스템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단락꼬리 - 미국 켄터키의 지역 도살장들이 없어지는 것을 예로들면서 위생을 빌미로 한 육가공업체의 대규모화와 소농의 몰락과정을 문제삼고 있다. 곰곰 생각을 해보니 소비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생협도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도 있겠다 싶다. 자칫 생협회원들에게 집중한다고 하면서 지역의 또 다른 도소매상이 문닫는 모습들도 고려해야 한다. 글에 지적하듯이 소비자와 생산자사이를 좁히는 방법과 시스템에 대해 같은 무게로 고민하지 않으면, 글자 그대로 착한 소비의 그물에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 [위생과 소농], 1971

 

111 길든 것과 야생은 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 두 세계에서 정말 낯선 것은 기업화된 산업주의다.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삶이 이용하는 물자에 대한 존중도 없는, 난민의 경제생활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던져 봐야 할 질문은 야생 세계와 길든 세계가 별개의 것인지,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둘의 분리할 수 없는 연관성을 인간의 경제에서 어떻게 하면 적절히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117 건실한 농민이 생산한 산물에 대하여 받는 대가는 형편없으며, 보존에 기여하는 노릇에 대한 대가는 아예 없다. 오늘날 건실한 농민은 질이 우수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놓고 앞서 말한 역할들을 모두 잘해 낸다 하더라도 건강보험료를 낼 형편이 되지 않으며 언론에서 촌뜨기나 무식꾼으로 풍자되고는 한다.

 

122 생산물의 공급을 결정하는 것은 화폐나 신용이나 시장밖에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토지 이용자와 보존론자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달리 말해 그들은 땅을 착취하는 기업의 주장에 항상 내재되어 있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경제와 생태 사이에, 인간이 길들인 세계와 야생의 세계 사이에 안전한 단절이 있을 수 있다거나 실제로 있다는 생각 말이다.....내가 보기에 보존론자와 토지 이용자 양쪽이 너무 단절되어 있는데, 그런 현실을 교정할 방법은 무엇일까? 각자가 자기 언어 안에만 갇혀 있으려고 하는 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둘은 이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말을 해야 한다. 보존론자는 토지 이용의 방법론과 경제학을 알고 능숙하게 다루어야 한다. 토지 이용자는 보존의 필요성이 갖는 긴급함을 경제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알아차려야 한다. [보존주의자와 농본주의자], 2002

 

단락꼬리 - 생산물 공급을 결정하는 것이 화폐나 신용이나 시장밖에 없다는 착각은 정말 강하다. 이런 자본주의의 밖, 외부에 대해 고민을 가져가지 보다는 사람을 무의식중에 뺀 숲이나 생태만을 논하거나 농사만을 이야기하고 서로 원칙을 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외부는 이렇게 소소한 것에서 살아내고 있다. 고민과 언어를 섞는 연습과 자본주의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살고 있는 경제가 있다는 점들을 느껴서야 다른 세계가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시장과 돈이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 결을 벗어나는 연습은 정말 가까이 있는 것들을 꿰뚫는 노력과 연습, 논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뱀발.  [온 삶을 먹다]를 읽다가 책갈피를 해둔 곳을 다시본다. 놀랍고 두렵다. 생각들이 현실에 뚜벅뚜벅 걸어나올 듯 싶어 더 당황스럽다. 현실을 담지 못하는 추상적인 연습습관을 돌이켜보자니 부끄럽다. 현실을 녹이면서 생각길조차 만들지 못하는 지금이 괴롭다.  접힌 곳들이나  흔적을 남겨둔 곳을 다시 새겨봐야겠다. 겨울이 서서히 익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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