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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사상은 늘 태동하고, 저변을 흐르고 있고, 유연하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 속에 조금 조금씩 숨어있고, 삶과 밀착해 있다. 절대 떨어져 있지 않다. 허공에서 찾기 보다 삶, 생활 속에 삶을 지탱, 변화하게 하는 것들을 듣고, 보고, 모으면 얻을 수 있다. 정리하는 습관을 중요하고, 그 저변에 있는 것들을 취합하고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시선주기를 잃지 않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생명력 있는 보편타당성을 만들 수 있지만, 그렇게 만들어지는 순간 유연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항상 저변에 흐르는 이야기와 삶과 교감하여야 한다. 그렇게 사상과 삶의 주고받기가 없는 한, 생명력이 있는 사상이란 나오기 힘들고, 그렇게 되는 순간 박제화의 위험을 감수하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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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은 이른바 '엠티'라는 행사를 치른다. 이 행사에 신입생,복학생,편입생 들이 서로 안면을 익히기 위해서 자기 소개 시간을 갖는데, 이 때 그들은 인사의 첫머리를 '명몇 학번 아무개입니다'라는 같은 표현을 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시작된다. 우리나라 대학교는 숫자로 사람을 관리해야 하는 교도소 체제도 아닌데, 왜 이름 앞에 학번이라는 숫자를 꼭 달아서 천명해야 할까? 대입 수능고사에서 수험 번호를 빠뜨리면 낙방한다는 교사와 부모들의 강박적 훈계 때문에 이름 앞에 번호를 쓰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면, 학번 숫자 여덟 자리를 다 말해야지 왜 앞의 두 자리 수만 밝히는 것일까?

- 언어는 그 구조대로 무의식을 형성시키기 때문에 언어 형태만 변화시키면 얼마든지 주체를 주체를 전체의 질서와 윤리로 환원시키고 복종시킬 수 있다.(예법이 생명과도 같았던 그 옛날에도 '지나친 높임은 오히려 예가 아니다'라고 경고 하였다. 그런데도 이렇듯 과도한 존대로 흐르는 것은 언어의 체계성이 포섭하는 지배권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주체의 강력한 욕망이 기호로 발현된 결과이리라.)

- 기하학적 공간에서 만들어진 복잡한 호칭으로 자신고 타자를 인식하도록 훈련을 받아쓰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인식할 때 좌표적 인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 이러한 구조의 언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전체주의 윤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누구를 비난할 때 처음에는 개인의 잘못을 집중 성토하다가 상대가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나름대로 논리로 저항하면 으레 껏 "너 뉘집 아들이야?"로부터 시작하여, "너 무슨과야?" 또는 더 나아가 " 너는 애비 애미도 없느냐?"등과 같이 상대가 속해 있는 체계 텍스트를 들먹이는 경우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즉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상대방의논리를 무화시키고 논리성의 피안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초 논리적 논리가 바로 전체주의 윤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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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주소록 - 어떻게  피카츄사전처럼???: 장단점을 어떻게 구분, 특색있게 분리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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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너무 앞서서 나가는 것은 아닐까? 몸이나 행동의 변화에 아직 감당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무게중심을 80으로 옮기는 연습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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