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구와 몸: 몸이란 말이 '모으다'에서 왔다고 한다. 이것저것, 여기저기에 흔적을 모으는 일들. 모아놓은 책들을 들고 감기몸살로 불잠을 자고 있는 유니를 훼방놓지 않기 위해 여기저기 몸을 옮기며 본다. 오랜만에 신문도 보고, 저녁짬을 알뜰하게 챙겨본다. 이태호님의 겸재 정선의 진경에 대한 부분을 살펴읽다. 그림 속의 장면을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살펴본다. 금강산과 박연폭포를 생생하게 몸품을 팔아 비교검토했다. 그래서야 진경의 뿌리와 새로운 눈이 삐죽 솟아 오른다. 모두 몸과 깊이가 느껴지는 연구의 덕택이다. 



2. 행복의 정복: 지난 번에 빌려보다가 산 책이다. 역자의 말처럼 행복의 정복이 전적으로 사회문제를 다루지 않고 개인에 관한 부분이라면, 이 책은 행복의 정복 2 (사회편)인셈이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그는 싸움(전쟁)의 시발점을 집요하게 캔다. 나누고 나누고 나누는 일이 차별을 낳고 이렇게 강연을 한지 백년이 되어가는 지점에서도 여전하다. 그는 이성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충동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움직이는 바탕은 목적이 아니다. 목적과 욕구의 이면에는 충동이 달라붙어 있는데 이를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목적을 갖는다는 것, 이성은 사람을 아주 조금밖에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나무는 적정한 토양과 환경이 주어지면 자란다. 사람 역시 적정한 여건이 되면 움직인다. 그런데 그 충동이 죽음과 파멸로 이끌도록 충동을 잘게쪼개어 거세시켜 욕구불만이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이 생명과 성장에 보탬이 되도록 조절하고 여건을 만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대부분의 제도가 안타깝게도 생명과 성장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사회는 경제적 이득만을 바라보며 움직여 대부분의 사람은 힘겹다. 그는 사회주의가  경제성장에 경도되어 문제가 심각할 것을 우려했다.

사람들의 행위의 근저는 합리성이 아니다. 충동을 보살피고 키울 줄 알아야 사랑, 건설, 삶의 기쁨을 겨우 논할 수 있다한다. 민족과 국가를 넘어설 수 있다 한다. 



3. 유적존재: 사회적 존재론은 유의미하다. 이론은 근육이 아니라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책을 다시 본다. 이론의 발전이 개인을 신에게서 구해내고, 주체와 객체를 분리해낸 결과 압축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 등 개념의 확장과 더불어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과 존재론에 있어 칸트와 헤겔을 분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가 그렇게 발라낼 수 없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청년 맑스가 이야기했듯이 사람이란 人 서로 기댈 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 그물에 출렁이는 존재라면 인식론까지 바뀌어야 한다. 때론 "서사적인 나"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기준점이 바뀌는 순간, 쌓아놓은 상아탑과 구축물은 다른 관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의 "-너-나-너-"로 인식되는 순간, 한순간에 밀이 이론적 해명을 했던 "자유"는 영락없이 무너진다. "평등"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 니체가 서있다.  신에서 구해낸 나의 확장, 위버멘쉬, 초인은 다른 관점을 삼켜야 한다. 그 앞에 바쿠닌과 막스 슈티리니가 있다 한다. 

 

- 제대로 된 혁명 -


뱀발. 비가 그치지 않는다. 장마 속을 바지런히 걷는다. 머지않아 장마가 걷힐 것이라 다짐해본다. 생각의 동무들이 하나 둘 생길 때, 길도 날도 점점 밝아지고, 파랑으로 개일 것이다. 긴 회색톤의 비구름도 물러날 것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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