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버튼을 누르자 손전화의 감이 떨어진다. 낯선 번호가 찍히고 예에~란 대답이 두번 나서기 전에 목소리톤을 알아차린다. 뜬금없이 감사를 해달라구?  총회가 목전인 듯한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분위기가 읽힌다. 내일 그리고 간다고 약속을 잡아버린다. 지난해 총회에 나오란 얘기도 듣지 못하구 선임된 감사가 필요하다구? 벌써 일년이 흐르고 아*** 책방 인권 모임들이 이어지면서 건네듣는 소식들이 안타깝기도 했는데 말이다. 점심이라도 할 요량으로 문자를 보내고  나무카페를 확인해본다. 즐찾해논 카페에 들른지도 벌써 서너달이 그냥 흘려버린 것이다. 지난 여름 캠프의 흔적이 인상깊어 동향이 궁금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점심으로 촌돼지 두부찌개에 막걸리를 시키니 주전자로 한되가 나온다. 둘이 마시기엔 그렇기도 한데,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며 권하고 보탠다. 이야기 속엔 관계가 농축된 회원들과 일들이 함께 붙어나온다. 시의원들과 농도, 그리고 양심 멤버들의 눈높이에서 보는 모임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결이 겹치는 이들과 만남. 일들. 뜨문뜨문 보게된 모습들이 거울조각을 모으듯 이어진다. 비영리법인 등록을 하기위한 서류들, 인권센터 사람에 가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 인권조례를 의원과 함께 구상하고 광주의 보다 나은 사례를 적용시키면 좋겠다는 이야기. 작년에 이어 캠프를 치르기엔 예산이 없고 빠듯할 수 있다는 말씀. 일들이 잘 농축이되면서 진행되면 좋겠다는 이야기. 독서모임-사진-소모임을 하고파하지만 운영위원들도 많지 않고, 추가 선임도 곤란한 상황들... ...

왜? 흐름과 모임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양심과,  인권...자신의 색깔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 더디다. 겹침이 필요한 것일까? 몸의 겹침이나 통일에 대한 토론이 있으면 나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고 한다. (김규항의 섣부른 논박이 잡힌다. 여러 시선일 것이다. 단 하나의 동일한 주제의 시선이 아닐 것이다. 습속에 대한 돌아봄과 짧은 글로 다룰 수 없는 넓이에 대한 여유와 숙성된 대응이 아쉽다. 몸과 가슴, 손발의 문제를 머리만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아닐까?) 인권보다는 사회권으로 성원들의 겹침을 만들어내면 어떨까 한다. 박래군샘의 자문을 받아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하고, 축적을 해내면 개인 토대의 인권에서 그래도 기우뚱 중심을 조금은 함께나눌 수 있는 사회권의 제기로 이동해내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 될 듯하다.

성원들의 갈래는 제 맘대로 고삐를 잡고 싶어한다. 하지만 끌려갈 말들이 아니기에 오히려 성원의 색깔이나 몸의 흔적과 함께있지만 날선논의들이 아주 조금 모임을 끄-을-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란 지금까지의 관행들은 탁상공론의 진수를 보여주며 배경으로만 잡히며 점점 흐릿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한다보다 어떻게 성원을 더 참여시키고 같이 몸을 버무리게 될른지, 고민의 실뿌리를 나누게 될지가 더 중요하다.

민*당 조*통*위 정책위원장이라 인권이 낯설겠다 싶다. 하지만 장애관련 연수를 받고 진하게 토해냈던 경험들이 같이 읽힌다. 정신병, 우울증의 약물경력만 있다면 보험이 되지 않고, 수용시 1인 120만원의 지원이란 고물은 병원감금과 영리의 순환고리를 갖추게 된다. 미쳤다는 딱지는 그렇게 순환되고 장애가 아니라 무권리의 사각지대가 버젖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한다. 정신병 관련 인권이란 영역을 조금 비춰준다. 세상에나? 잔뿌리가 여기저기 있다. 당적의 끈이 움직이는 결에 낯익은 이름들이 호명된다. 밖에서 보는 아***에 대한 이야기, 섞이기 힘든 ㅁ ㅗ ㅇ ㅣ ㅁ의 막힌 곳들이 보인다.

이을 수 있을까? 꽃샘추위 속 한낮의 햇살은 따듯하다. 막걸리로 오른 볼이 더 빠알갛게 익는다. 사월쯤 지*과 술한잔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얼콰해진 마음을 건넨다. 건네질지 모르지만 감사보고겸해서 흔적으로 남긴다. 아마 관심이 연결된다면 여섯달쯤 지나 사람이 조금 겹치게 될 쯤 회자라도 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보탠다.

뱀발.  

일관된 동선부족과 일처리에 대한 지적을 몇번 건네 받았다. 누가 누구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엔 늘 섞인다. 실무에 대한 지적과 바뀌면 좋을 것들이 이상적인 바램과 섞이기 마련이다. 곰곰 생각을 되짚어보면 바램과 할 수 있음의 간극을 크다. 심리적인 연유부터 습관, 성원들의 스타일, 습속, 참여의 정도부터 하나 하나 원인제공을 하며 모임 이란 냇물이 흘러가는 곳의 돌과 바위가 되기도 한다.  이념이거나, 이념 속에 아픈 삶이라거나, 가지고 있는 환원된 모토들이 오히려 모임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환원된 가치를 주장하므로써 모임은 한걸음도 현실속에서 딛지 못하거나, 잠깐의 열정만을 데우져서 오래가지 못하거나, 대행심리가 지나쳐 사무국의 관전을 바라보는 객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새로운 일들이 고정된 가치에 어긋난다고 시기를 하기도 한다.

그가 민**원의 일원으로 움직여온 생활, 그리고 인권에 자리하며 참여한 동기와 능력은 왜 못움직이는지 왜 움직일 수 있는지가 동시에 느껴진다. 느리지만 챙긴 실무들도 왜 더딘지 실무의 호흡에서야 겨우 어깨너머로 살펴볼 수 있다 싶다. 그리고 연결된 관계의 선들이 굵은 실선인지 가느다란 실선인지, 어디가 끊어졌는지? 그리고 회복의 기미에 대해 가늠하게 된다. 어쩜 몇몇의 몸겹침(체험)의 공유로 어이없이 해결될 수도 있고, 어쩌면 삶이 켜로 쌓여도 전혀 다른 길로 아무런 파장도 미치지 못하며 지쳐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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