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 인력과 운명

세개의 사과라고 하자.(네개를 말했지만 말이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퓨리에의 사과이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물체와 물체 사이에 중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중력이 있음을 발견하자 자연의 운동을 연결짓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퓨리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열정적 인력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사람과 사람사이의 열정적 인력이 왜 발휘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천원하는 사과가 만원에 시장에서 팔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천원이면 되는 것이 왜 만원에 팔릴까? 이것이 합당한 일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한쪽에서 굶어죽는다. 사회는 물질적 운동과 달리 다른 운동법칙이 존재한다. 유기적 운동과 동물적 운동과 달리 최소한 먹고 살아야할 운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먹고 살기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규모가 필요하지 않다. 한명이라도 죽는다면 사회적 운동 법칙에 맞지 않는 것이다. 열정적 인력으로 움직이는 사람과 사람사이는 단 한명도 죽이지 않는 먹고살 궁리를 갖고 태어난다. 먹고살 궁리는 천원짜리는 만원에 팔고 사는데 있지 않다. 백명이든 천명이든 그 단위를 갖고서든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게 해내면 다른 곳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열정적 인력과 사람의 운명은 한 덩어리다. 이것이 퓨리에의 사과이다. 하나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이론과 설명은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물질적운동, 유기적 운동, 동물적 운동, 사회적 운동과 일반적 운명에 관한 이론의 요지이다. 

 
생각필터

뱀발. 잠의 끝자락에 앞의 단어가 선명해지는 것이다. 새겨둔 말이 꿈틀거린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열정적 인력이다. 사회가 움직이는 법칙과 운명을 한데 묶은 이론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한가지로 묶어 사유한 사람은 없다. 사람과 사람사이는 열정적 인력이 중력처럼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중력은 물체가 떨어지듯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열정적인력이 작용한다는 것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사회가 있는 이상 단 한사람이라도 행복하지 않는 이론이 있다면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그것을 방기하는 이론은 법칙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지난 25세기의 모든 학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경제, 철학, 예술...모두를 말이다. 2년뒤면 그가 이렇게 사회에 대해 천명한지 200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의 책은 달랑 한권이다. 거칠기 짝이 없는 그 책은 사랑과 살림살이와 ....꿈결이 생각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일텐데. 이름 잘 붙였다고 생각한다. 밥-일-꿈이다. [밥-일-꿈]이 한묶음으로 가지를 칠 수 있다. 그제서야 야생의 사회가 아니라 이제 막 사회인으로 걸음걸이를 하는 것이라고, 겨우 사회의 운동법칙을 구현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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