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는 2006년부터 관심의 중심을 유지시키고 있는데, 이십대의 저자이기전에 지금여기에서 나름 다른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지식을 수입해서 중개상의 시류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관심과 노력으로 자생적으로 지식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누구누구가 유행입네..그 시류에 편승해서 비평이든, 평론이 난무하고 알량한 지식을 구걸하러 다니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 같다.
사유의 폭을 만들고, 행동의 진폭을 만드는 일이 지금에서야 생긴 엄청난 진폭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교수이든 강사든 이렇게 지적흐름이 생기고 폭이 넓어질 가능성에 긴장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까? 원서를 쫓고 번역을 빌미로 지적유희를 조장하는 일들이 가능하지 않다. 관심과 열정이 있다면 지식인들의 사유의 폭을 넘나들며 또 다른 사유를 만들 수 있다는 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정치철학의 외연이 넓어지고, 동양철학의 사유와 접목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정치철학의 그룹이 여기저기 생기고, 삶의 또다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면....이십대가 아니라 십대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세상의 비를 함께 맞으며 고민도 나누고 삶도 섞고 싶다. 당당한 이십대가 좋다.
#2. 평행우주, 초끈이론, 11차원....우주에 대한 저기가 있을까? 외계엔 생명체가 있다는 확신...글쎄. 그렇게 출발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유리할까? 없어도 현실은 달라질 것이 없다. 그렇게 바닥을 보면 거기에서 시작하고 앎을 증식시킨다고 해서 불리할 것도 없다. 환원의 사유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최종이론도 없고, 최종 환원도 없어야 한다. 그것이 현실을 훨씬 더 유연하고 풍부하게 보는 지름길은 아닐까?
뱀발. 1.주말 낮술모임이 발족했고, 어젠 연구공간 개소와 더불어 여러분들이 마음을 섞다. 낮술모임에서 잠깐 이십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 2007년 사회적 독서로 수유너머에서 이십대 대학생을 만나고 그 친구가 생활하던 카페에 들낙거린 적이 있다. 생활공간을 공유하면서 사유와 삶을 만들려는 노력이 무척 보기 좋았다. 박가분님도 그런 공간들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모습이 좋아보인다. 그들의 고민과 사회의 연배가 있는 형,누나들의 고민은 그리 다른 것 같지 않다. 더 통하고 더 생각을 짓고,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싶다. 더 많이 생기고 사유하고 모듬들이 만들어지고....일상이 늘 혁명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헌데 자본의 겹겹은 더욱 진하고 단단하다. 사유는 깊어지되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 자본도 무럭무럭 자기를 우리보다 풍부하게 살아낸다. 정말 그것을 감싸 안아 잠재울 능력은 되어야...자본의 숨이 조금씩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밤은 깊다. 하지만 새벽이 조금조금 미소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2. 왜 긴장을 하지 않을까? 지식인입네 하는 분들은 또 어디 기댈꺼리를 찾는 중인가? 또 다른 문화현상으로 취재라도 해야할 듯 싶은데...비평가들은 어디에 꼭꼭 숨어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