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産者들을 위한 마키아벨리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읽고
이상재(대전환경운동연합)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급진적인’ ‘급진주의자’와 같이‘급진’이라는 어두(語頭)가 붙은 단어에 대한 이 사회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고 마음 넓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2년 전 쯤에 처음 소개 받았을 때의 나의 개인적인 느낌 또한 별다르게 큰 감흥은 없었고,‘급진’이라는 어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지례 짐작하기로는 다분히 전형적인 운동권 -그러니까 좌파,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류- 의 생활규범과 같은 종류의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사 놓고도 한 참을 읽지 않다가 책을 펼쳐 보게 된 계기는 한 계간지에 소개된 이 책의 서평을 읽고 나서였다.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공통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이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저자 ‘사울 D. 알린스키’였다는 사실은 나의 지례짐작이 그저 짐작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의심과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오바마나 힐러리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이 책에 들어 있는 오재식 선생의 추천사와 알린스키의 서문을 읽은 것만으로도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사이사이 가끔씩 눈길이가는 제목 옆의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천적 입문서’라는 부제목은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의 이정표처럼 나에게 인상지어졌다. 골방에 틀어박혀 변혁을 문자로만 이해하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적’인 급진주의자의 ‘실천’적 입문서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알린스키는 처참하고 힘든 현실에서 변화를 바라는 민중과 그를 조직하려는 조직가(활동가)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았다. 내가 굳이 경험을 ‘들려주기’위해서가 아니라 ‘전수하기’위해서라고 표현한 것은 그 만큼 이 책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례와 그에 맞는 전술과 전략을 매우 상세하게 실어 놓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매우 현실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당혹스러울 만큼 파격적인 알린스키의 조직화와 그에 따른 문제해결 방법은 간혹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 알린스키는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가진 자들을 위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하여 쓴 책인 반면 이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가진 것 없는 자들을 위해 권력을 빼앗는 방법에 대해 쓴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게 대중조직을 만들어 권력을 빼앗은 후에는 지체 없이 민중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알린스키는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 그는 미국 내 수많은 빈민지역과 분쟁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주민조직을 만들거나 해결한 후에는 3년 이내에 미련 없이 그 지역을 떠났다고 한다. 힘없는 사람들의 희망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마키아벨리즘’과 유사한 현실적인 전술전략을 펼쳤지만 그 자신이 전술전략의 성공에 따른 혜택은 거의 보지 않았다는 것은 이 현실적 급진주의자의 낭만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알린스키의 생각과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미국 내 중산층에 대한 알린스키의 인식이었다.
이 책이 나온 해가 1971년이었으므로 한창 베트남 전쟁이 전개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 추악한 전쟁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군부와 기업들의 탐욕에 대해 눈을 감았던 40%에 이르는 미국 내 중산층에 대해서 알린스키는 이들을 조직하고 선동하지 않고는 미국의 앞날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는 인식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부패한 정치, 욕심의 끝을 모르는 기업들, 그러나 이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것은 이들에 대해 분개하지 않거나 혹은 분개한다 해도 변화로 이끄는 행동으로 전환시키지 않는(혹은 모르는) 중산층에 대한 알린스키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의 우리나라 모습과 매우 유사하였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훨씬 넘는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 때문에 중산층이 알린스키 시대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적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싶다.
2008년의 대한민국 총선에서 자신을 중도, 심지어 진보적이라고 자평했던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뉴타운 건설’이라는 황금방망이의 요술에 맥없이 휘둘리는 것을 확인한 나에게 알린스키의 40년 전 지적은 전혀 시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아프고 날카로웠다.
2008년의 촛불에서 우리는 매우 다양한 계층과 계급에서 촛불을 드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것이 그야말로 촛불처럼 가뭇없이 꺼져버리는 현상 또한 볼 수 있었다. 이것 또한 혹시 황금만능주의에 여과 없이 노출된 채 조직화되지 못한 중산층 계급의 한계는 아니었는지 한번 음미해볼만한 일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얼마 전에 읽은‘로버트 D. 퍼트넘’의‘나홀로 볼링 Bowling Alone’이란 책의 내용 일부분이 떠올랐다.
미국사회가 1960년대 후반부터‘깨진 유리조각처럼 '(숱한 개인들의) 원자화'로 파편화되어 가고 있었는데 미국인들은 점차 선거에도 무관심하고 지역사회의 학교 운영회의나 공공 업무 관련 회의는 물론 교회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 타인에 대한 믿음, 정직성과 상호 신뢰, 그리고 개인의 일상적인 사교까지 줄어들어 사회적 자본이 크게 감소했다고 한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으로 사회적 유대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혼자서 볼링을 치는‘나 홀로 볼링’이라는 것이 퍼트넘의 연구였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정치권과 재벌, 족벌언론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오히려 그 위세를 키우고 있는데 반해 우리 사회의 대중들 역시 알린스키와 퍼트넘이 주장한 미국 대중처럼 원자화되고 파편화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은 아닐까?
그러한 파편화되고 보수화된 사회의 위험에 대한 기준과 현상 역시 알린스키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진지한 처방역시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71년에 이 책을 낸 알린스키는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강의나 교육 때 마다 종종 했던 말“너희가 정말 행동하는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침대에서 죽을 생각은 말아라”처럼 그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내년이면 이 책이 나온 지 40년이 되지만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 책에 서술된 그의 문제의식과 활동규칙은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꾸고자 하는 세상의 본질 또한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세상을 지금의 모습에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자신들이 믿는 모습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천적인 전략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쁜 머리의 한계 때문에 알린스키에게 배운 내용을 지극히 단순화한 내용의 핵심은 이것이다.
만약 바꾸고 싶다면 조직화하라! 그리고 행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