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달은 휘영청 밝고 돌아가는 산길은 은은하다. 오랜만의 전화에 저녁 겸 아*** 속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만남과 관계짓는다는 얘기엔 속마음이 서려있다. 아이키우는 일도 속마음이 어떻게 읽히느냐가 관건이다. 내려다보는 시선 속엔 마음이 없다. 눈높이를 맞추거나 눈높이의 떨림이 없다. 그렇게 만나 설레임의 시선으로 뭉쳐지지 않는다. 늘 내려다보이고 내려다보이기에 읽히는 이는 만남과 관계의 대상이 아니다.

직접 만나려하지 않고 대상화하려는 순간,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공이나 전문분야의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 언어의 공통분모가 있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직접 시민이나 주민을 만나는 순간 언어는 달라진다. 정보를 주려는 순간, 주민이나 시민은 무지한 인간들이 되고 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언어를 반성하기보다는 상대의 수준을 탓한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별반 장점이 아니다. 더구나 전문가라고 해서 우쭐한다면, 그것이 은연중에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에 대한 무시를 동시에 과시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가끔씩 접하는 전문가, 어른, 부모의 시선이 이것을 닮았다. 그래서 그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끊임없이, 은연중에 억누른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레이지 않는다. 새로운 만남이 없다. 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녹일 수가 없다. 그 시선들 속의 그림자엔 늘 무시가 잠복해있다. 표현이 문제가 아니다. 속마음과 태도가 문제다.

3차원의 시선, 관전의 시선, 관조의 시선은 삶의 시선이 아니다. 정작 설레이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2차원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난 너의 뒷모습과 만나고 있다가 어느새 당신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다. 3차원처럼 시선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깨동무의 시선, 눈높이의 시선....언제나 난 당신을 만나 설레일 준비가 되어있다. 

뱀발. ㅅㅁㅅ.ㄱ-ㄱ예비부부,ㄱㄱㄷ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참* 강연에 대한 지적도, 불*강좌에 있었던 최근소식도, 이**샘 이야기, 삼국장의 교육받은 이야기, 그리고 늘 민주주의도 관계가 밍밍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도 보태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ㅆ ㅇ 만들어진 관계속에서 다시 관계를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내려다보고 구상하려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 어쩌다 주절주절하다보니 사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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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3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