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전, 독일 한 마을(뷔르템베르크) 이혼신청 48건에 대한 분석
철도가 들어오고 토지소유제도가 변경되고, 가정은 자급자족의 생산에서 환금작물인 과수를 생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부식물을 심던 농장과 텃밭은 없어져 버린다. 이런 변화는 한 세대안에 일어났다. 이전까지만 해도 텃밭에서 재배해 먹던 부식을 돈을 주고 구입해야 했고,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자들은 느닷없이 남자들의 일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엌에서도 더 많이 더 빨리 일해야만 했다. 이 이혼수속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혁신들로 인해 남자와 여자 모두가 얼마나 심한 동요와 무력감을 느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일견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결정한 일들이 실제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여자들의 불평은 남자들이 갑자기 자기들에게 일터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는 점인데, 이는 생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일 그 자체를 지시할 수 있다는 발상을 여짓껏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자기 영역의 상실을 한탄했다. 남자들은 저녁 주막에서 피로를 풀 수 있지만, 자기들은 괭이를 놓자마자 서둘러 집에 돌아와 부엌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신종의 선망, 상대방 젠더의 스케줄과 리듬에 대한 선망이 싹트게 되었다. 남자들의 불평은 자기 아내가 자기 엄마에 못 미친다는 점이다. 예전 식단은 풍성하고 다양했는데 이제는 날이면 날마다 밀가루떡이나 먹고 살아야 했다. ........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들이 되찾아야 할 것
지금 우리 세계가 서 있는 기초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은 상실되어 온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과는 전연 다른 일이다. 백밀러로 과거를 관찰하는 역사가에게 작은 낫과 큰 낫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기술'에 의해 대치되고 만, 예전에 추수에 사용했던 지방의 농기구에 불과하다.
만약 그러한 역사가 인간의 심성과 감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커지는 특유의 소외, 고독, 착취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새로운 시장경제, 기계화, 또는 기아로 사람들이 받게 되는 고통이 검토될 것이다.
전통적인 젠더의 상실에서 기인하는 또 다른 손상은 이제 새 배관공사로 씻겨져 내려 슬픈 역사의 가리워진 뒷면에 남아 있다. '그녀'가 작은 낫과 함께 잃은 것은 무엇인가? 큰 낫과 함께 '그'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또 무엇이었는가? 잡동사니의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이제 거의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특유의 버내큘러한 감정을 이리저리 뒤져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가라면 수천년전에 걸쳐 존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료들의 눈을 빗겨간 젠더적 실재의 죽음을 기술해야만 한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역사에 관한 그와 같은 '중앙집권주의자'의 시각에 맞서기 위함이다.- 과거의 언어, 관습, 제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의 그것의 배아 형태, 즉 진짜 조상이라는 것이다. 현대 도서관의 책꽂이에는 계급구조의 유래를 그리스의 도시국가에다 돌리고, 궤변을 팔며 돌아다닌 소피스트를 현대교육의 선구자라고 일컬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성생활을 보고하는 책들로 꽉 차있다. - 그리고 나는 과학적 역사가라는 명칭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나는 핵심어라든지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개념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 일리히의 책 [젠더]를 다시 빌려 걷기의 속도로 다시 보고 있다. 몇번을 반복해서 주석도 꼼꼼이 보고 있다. 지난 번에 놓치거나 밑줄들을 다시 음미하고 있다. 역사학을 공부했던 그의 역사관이 눈에 들어온다. 폴라니의 생각처럼 경제만을 발라내서 사고하는 환원의 맹점에 대해서 궁금했던 역사학을 하는 방법이 눈에 띄인다. 역사학이 갖는 중앙집중적인 기술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2. 70년대 후반의 글이다. 오늘 서점에서 본 박홍규의 [절제된 사회]에서 일리히 그는 아직 전 세계 2/3의 인구가 다른 삶을 살 수 있기에 책을 낸다는 말이 남는다. 그의 역사관점을 따르자면 자본이 지나가는 철로와 도로가 뚫리는 순간이 폭발시키는 삶의 공황은 더욱 정밀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3. 그의 관점을 빌리자면 우리의 근대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 분열과 폭발 지점도, 지금의 현실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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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 02 자본주의 ---------------------------------
.자본주의 - 전-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대립은 내게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대립이 젠더체제에서 섹스체제로 이르는 변천과 사실상 일치하는 사회적 변이를 지적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젠더체제에서 버내큘러한 생활양식과 젠더의 붕괴시기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전-자본주의 시대의 유럽에 이어지는 두 단계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첫번째 단계는 버내큘러 젠더의 상보성에 기초한 자급자족의 단계이다.
그 단계에서 상품은 결정적으로 2차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젠더가 붕괴된 단계에서는 경제적인 혼인의 결과로 나타난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단순한 상품생산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그러므로 단순한 상품생산이라고 일컬어져온 것은 주로 젠더화된 혼인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잉여임이 입증된다.
이 두 단계와는 대조적으로 다음 단계의 자본주의적 상품은 전혀 이질적인 가정에 기초한 사회의 산물이다. 즉 젠더 부재를 의미하는 경제적 노동의 생산물이다. 이 노동은 산업화의 첫단계에서 자본주의적 상품에 대한 가사의 의존이 주로 임금노동에 의지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요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말에 이르자 이 노동은 압도적으로 섀도우 워크에 의지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젠더를 분석함으로써 칼 폴라니의 다음과 같은 탁월한 두 분석에 또 하나의 범주를 추가할 수 있다. 폴라니는 교역 상품과 상인에 의해 제공되는 상품을 구별한다. 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 구별을 인정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젠더와 연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이 단순상품을 자본주의적 상품, 즉 산업적 재화나 서비스와 비교하였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와 달리 젠더를 기원으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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