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호되게 꾸었다. 너무도 선명한 색깔과 강렬함은 영화를 닮아있다. 하지만 영화가 전하지 못하는 것은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아픔이다. 칼이 어슷하게 들어오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놓다. 몸은 높은 성곽을 떨어지지만 마음으로 주검을 받아들이자 평화다. 행복함이 밀려오는 듯 몸은 유연하고 가볍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편하게 날다. 어느새 장면은 바뀌고 일터 동료의 소개를 받아 성의 안, 어두운 벽사이를 간다. 기억은 중동나다가 남은 장면 속에 심장은 발려져있고 연신 맥동질한다.

 
나란 존재는 여전히 날 것으로 세상에 던져져 있다. 전쟁통도 아니며, 열외자도 아니며 심한 병을 앓고 있지도 않다. 안온한 세상의 포대기에 감싸져 있다. 그 상자는 내일 불에 붙어 사라질 수도 있으며, 옥상 난간이 문들어져 그 밖으로 튕겨져나갈 수도 있다. 세상의 온기속에 아이처럼 놓여져 있을뿐이다. 그 온기가 냉기로 바뀌고 엄혹해질 수 있는 확율은 점점 커진다.

연휴 중간에 읽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책평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억울한 누명 때문에 남편을 잃은 아내, 아버지를 사랑해 그의 아이를 낳은 여자,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동성애 취향의 장교, 아내를 잃은 후 7년 동안 한숨도 못잔 사내... 전쟁의 끝무렵,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의 모습이 지극히 건조하고 간결한 필치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끝없는 악몽'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버리고 혼자만 깨어있는 듯한 외로움. 그들에게 평온과 안식은 없는 단어다. 지독한 고독에 시달리던 아이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고통을 견디기 위해 마음의 껍질을 단련한다.

"고통은 줄어들고 기억은 희미해져.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아."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분리'이며 이별의 시작이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헤어지고 상실한다. 죽음조차 삶과의 분리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영원히 '반대편'을 그리워하도록 운명지워진 가여운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세 권의 노트-세 개의 거짓말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렇게 책 안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오토딕스의 그림처럼 잔인과 그렇지 않음의 경계도 없다. 그런데 서양 오리엔탈리즘같이  선을  자유주의자들이 인권처럼 말한다.  그 선을 가장한 인권이란 것이 거꾸로 얼마나 가진자의 멋부리기인가?. 선과 악을 개념짓고 그 개념이 얼마나 허위에 기반한 것인지 질타한다. 인권의 오만함을 말하는 [윤리학]과 맞닿아 있어 어쩌면 그리도 심하게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이라고 말하는 순간 선은 사라진다. 선, 악은 악과 선은 그렇게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무의식 중에 접하는 그 판단의 위험성에 대해 말한다. 인류는 진지하게 고민덩어리를 가져온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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