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는 자아의 불가능성, 세계의 불가능성을 말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그 불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긍정이, 즉 나와 타자 사이의 '우리'의 가능성이, 날것의 소통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나와 타자으 ㅣ소통은 문화 바깥에서, 그리고 모든 정치, 경제 , 문화, 철학, 이념의 지평 바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95 

나와 타인의 관계는 개체나 전체의 본질을 전제하지 않으며, 다만 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만 발생하며 개체의 영역으로도, 전체의 영역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낸다. 우리의 존재, 공동-내의 존재, 즉 내가 타인을 향한 접근의 기호가 될 때, 내가 나의 고유한 내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나의 내면적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나의 존재 자체가 관계 가운데 해소될 때, 그 순간에 가능한 '우리'의 존재......97 

 

뱀발.  

1. 바쁘게 여기저기 다니다가 늦은 퇴근길, 인근 도서관에 들를 생각을 해보는데, 아 월요일이다. 공치는 월요일....그래도...벌써 열시를 가르키는데...어인일로 불이 켜져있을까? 분명 월요일인데...그리고 2층도.....여러권의 책들을 들고 올라가보니 도서실은 닫고 열람실은 자정까지 란다. 가뜩이나 생각이 마르기도 하고, 자란 실뿌리도 말라 비틀어질 것 같아, 가뭄에 그래도 가랑비라도 적셔주어야 할 것 같다.  손길이 가는 책이 여기다. 너-나, 개인중심의 서양철학의 문제점, 그리고 공동체...그런데 공동체에  밝힐 수 없는 이 앞에 자리잡고 있다. 죽음이나 문학이나 연애....의 비유를 든다.  

2. 차편으로 이동 중 습기를 짜버린 아침 날씨와 하늘.....구름 구름한 하늘이어서 덥지는 않았고.. 늦은 오후. 휘어진 골목길을 도는 순간 스친 목백일홍에 어찌나 반갑던지....마음이 다 그렁그렁해지고 시큰하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과 아내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즉 '둘'의 요소로 보지 않으려 합니다. 단지 그들은 자식으로부터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르시시즘, 즉 전형적인 유아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우리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내로서 남편을, 어머니로서 자식을, 아버지로서 자식을 진정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라는 사랑의 진리를 반드시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알랭 바디우, [윤리학], 동문선) - 사랑 그리고 가족이데올로기

뱀발. 사랑은 하나다. 무서운 환원의 유혹은 끝이 없다. 하나로 멈추는 순간, 긴장은 너로부터 연유한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함께 있는 궁극적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동-내의-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141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로 향함, 그에게 노출되어 있음, 그를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한, 그것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에 이를 수 있은 유한한 존재이다. 142


뱀발. 무엇과 완전한 개인은 한 통속인지 모른다. 개인으로 환원하지 말고 그 실선으로 닫힌 구조가 아니라 늘 점선으로 열린 인식체계가 그나마 닫히 해석의 세계, 그 틈을 열어 젖힐 수 있을지 모른다. 서구식 사고의 말미는 어찌 그 주체를 무너뜨리고 애초 무너뜨린 것들을 보듬는 것 같다. 퇴근길 하루 도*관을 더 챙겨 남기다. 1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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