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부터의 자유

1. 

행복한가? 행복을 밝히다보면, 행복의 지침서를 보면 행복의 길이 보이는가? 행복의 길이 나를 열어 젖히는가?  그 행복의 길이 부푼 풍선처럼 머리의 위안만 되는 것은 아닌가? 쾌락과 현실의 간극처럼 꿈만 부풀리는 것은 아닌가? 행복안내서가 한결같이 나를 빵빵하게 만들고, 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애초의 기획이 홀로 행복을 전제로 해서 애초부터 너는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닌가? 행복 지침서는 너를 배제하였으므로 오로지 나에 대한 문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처음부터 서로행복을 기획하지 않았으므로 이것 역시 고독의 지침서가 되는 것은 아닌가? 처음부터 어깨동무는 안중에도 없으므로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위안의 약물 복용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없고 그리운 너로인해 내가 있는 것이라면 같이 보고 느끼고 감응하는 우정은 별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겠지. 같이 다르게 또 풍부하게 전달되고 느낌의 화수분, 고갈되지 않는 시선들. 너와 나의 통로가 어깨동무가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고독의 행복은 저리가버리고, 우정도 사색도 자유도 이루어야할 것이 아니라 당연하거나 한몸이 되는 나-너의 어깨동무 시선으로 시작하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 그런 것이 서로 행복이라면, 자유도 사색도 우정도 곱씹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라면, 서로행복할 꺼리는 무엇일까?

그러면 질투, 걱정, 열정, 권태, 죄의식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영토의 확장이 나만에 갇히지 않고, 환대의 경계가 어디까지 열려있는 것일까? 아픔의 확장이 어디까지 넓혀지는 것인가? 너를 찾는 이들이 너를 찾아 행복했던 과정은 늘 닫힌 [나-너]의 1인칭으로 끝나버렸던 것은 아닐까?

2. 

행복이란 것이 나만의 에세이가 아니라 -나 - 너-의 에세이라면 너로부터 대여받은 나의 행복은 필연으로 너를 확장하는데 있다. 나만으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너로, 저기 먼너로 넓혀질수록 나는 행복하다. 너의 행복에 민감하므로, 나만의 행복으로 가두는 것은 행복의 몫이 줄어드는 것이다. 머리란 자족의 외피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몸의 확장과 몸의 사유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머리와 몸 경계의 차이와 간극이 될 수 있으면 작아지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행복이 머리에서 배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일이다. 몸의 행복에 닿아서야 행복을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 행복이 나의 머리에 그친다면 끊임없이 또 다른 머리의 행복이란 약을 주입해야 한다. 머리는 또 다른 행복의 자극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독의 철학뿐만 아니라 고독의 행복도 행복을 독점하는 엘리트만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행복해지는 행복은 홀로행복이 머리 속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너를 깨운다. 나는 너로부터 있는 것이기에 너에 붙어있는 모든 것에 민감하다.  나는 없는 것이라거나 깊숙히 판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이 너로부터 채우는 것, 주체에 대한 선입견을 지워버리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징검다리는 아닐까... ...

 

 

뱀발.  작은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해보다. 일터일로 시간이 겹쳐 저녁 시간에 대기 힘들 줄 알았는데 묘하게도 서울출장부터 몇템포가 바뀌니 행복하게 시간이 난다. 덕분 이렇게 참관과 참석을 번갈아 모임 속을 들어가본다. 보거나 느끼는 시선들이 다를 것이라고 여겼지만 선입견의 그늘은 선명한 듯 싶다. 말과 느낌이 섞이다보니 별반 대별될 것도 없지만 내내 이야기의 전제가 스며든다. 모임에서 서로 나눌 자리가 없다면 이 책도 홀로대면하고 잊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누다보니 당위의 말들을 곱씹어보게 된다. 그리고 한번쯤 생각을 좀더 키우고 싶다는 건넘는 만용도 서는 것이다. 그래서 두서없이 생각의 고삐를 당겨본다. 말들이 어디로 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닿는 이가 있다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다. 이렇게 삐뚜루한 시선이 들어서면 여름에도 춥고 낮에도 외로움이 칼날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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