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나는 '세상에 지친 이 몸에 죄로 된 짐을 지고'라는 찬송가를 가장 좋아했다. 내나이 다섯 살 때, 만일 일흔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이제 겨우 일생의 14분의 1을 견딘 셈이니, 내 앞에 길게 뻗어 있는 인생의 지루함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사춘기 때는 삶을 증오해서 늘 자살할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수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자살 충동을 자제할 수 있었다....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 또한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결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차차 나 자신과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르시즘의 행로
자신에 대한 관심은 어떤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기껏해야 일기 쓰기에 매달리거나, 정신분석을 받으러 정신과에 다닌다거나, 승려가 되거나 할 뿐이다. 하지만 승려가 된 사람도 규칙적인 수도 생활에 쫓겨 자신의 영혼을 잊을 수 있어야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승려가 종교에 귀의한 덕분에 누리고 있다고 믿는 행복은, 그가 어쩔 수 없어서 도로 청소원이 되었더라도 누릴 수 있었던 행복에 불과하다.
고독의 철학과 유적존재
이 세상에는 시대마다 갖가지 고독의 철학이 존재했다. 그 중에 매우 고상한 종류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과 초기 기독교도들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지만으로, 도는 다른 '인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도 인간의 삶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권력을 삶의 목표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단순한 개인적인 쾌락을 삶의 목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모인 크고 작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선이 실현될 수 있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앞에서 소개한 철학들은 모두 고독의 철학이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철학들은 모두 그릇된 것이다. 그것들은 그릇된 윤리학일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이 가진 보다 우월한 부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부정확하다. 인간은 협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협력에 필요한 우정을 만들어내는데, 물론 이 본능적인 장치가 완벽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사랑은 협력을 이끌어내는 최초의 감정 형식이자, 가장 보편적인 감정 형식이다.
글쓰기
비극을 쓰기 위해서는 비극을 느껴야 한다. 비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피와 근육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그러나 대부분의 문필가들은 공동체의 삶과 생생한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이 세상에는 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재능있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겠다.
"글을 쓰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대신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라.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생활을 해라"....예전에 지식인이었던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이렇게 생활하고 나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기에 도달하면 글을 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뱀발. 어제 흔적을 남겨두고 옮겨놓지 못하다. 제목은 별도로 붙였고 강조점도 편의로 덧붙인다. 러셀이 58세에 쓴 글이다. 나에게서 너로 가는 길...되새길 부분도 공감의 시선도 많아, 읽는 시간보다 흔적을 남기는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