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 - 희망한다는 것이 '누리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하지 못한 채 욕망하는 것'이라고 앙드레 콩크-스퐁빌은 규정하지.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욕망하는 이유는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당연한 얘기일 거야. 사람들이 부와 젊음과 건강을 원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그것이 없기 때문이잖아. 따라서 그런 것들을 희망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되지 못했거나 그것을 가지지 못한 상태'임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희망은 또한 '알지 못하고' 욕망하는 행위지. 만약 우리가 희망의 대상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올지 알고 있다면 그것을 희망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겠지. 희망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거든. 그리고 희망하는 것은 또한 '하지 못하고' 욕망하는 거야. 우리가 바라는 것을 당장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다면 희망이라는 길로 에둘러 가지 않고 즉시 그것을 실현하겠지.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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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남이 행복하지 않다면 내 삶의 완성도 기대할 수 없어, 따라서 도덕을 고려한다는 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문제에 접근하는 길이기도 해. 바로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거야. 295
물질주의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역사적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역사로부터 해방되어 역사를 바꾸고, 필요하다면 혁명을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지.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사랑하고 현재와 화해하고 과거와 미래를 쫓아버리고 오로지 이 순간을 살라고 말하지? 그러다가도 세상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하지. 간단히 말해서 물질주의자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을 언급하지만 항상 남을 대상으로 삼을 뿐, 결코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거야. 그는 항상 초월과 자유와 계획과 이상을 들먹이지.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고 자연과 역사보다 우월한 가치에 의해 동원되었다고 믿기 때문이야. 276
힘의의지- 권력에 대한 욕구나 높은 지위를 탐내는 욕망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것은 강렬한 삶을 원하고, 어떡해서든 내면적인 분열을 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야. 내면적 분열은 그 표현 자체가 말하고 있듯이 힘들이 서로 분열하고 상쇄되어 삶이 황폐하고 왜소해지는 결과를 낳지. 따라서 힘의 의지란 정복욕이나 돈과 권력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내면이 분열되어 허약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아주 강렬하고 생생한 삶에 대한 깊은 열망을 말하는 거야. 220
니체의 도덕이 어떤 것인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거야. 좋은 삶이란 가장 조화로운 삶, 가장 강렬할 삶, 가장 우아한 삶이며, 쓸데없이 우회하거나 무의미한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는 수학공식과 같은 삶이라고, 다시말해 생명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다투고, 분열하여 결국 위축되고 소진하는 대신에, 반동적인 힘보다는 능동적 힘이 주도권을 가지더라도 서로 협조하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말하지.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위대한 양식이었어. 217
최근 니체 해설가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자주 보게 되는데, 너도 그런 함정에 빠져선 안 되겠지. 그들은 마치 니체가 삶을 더 자유롭고 더 쾌활한 것으로 만들려면 반동적 힘을 버리고 오로지 능동적 힘만 수용하고, 메마르고 차가운 이성을 버리고 감성과 육체를 해방하라고 주장이라도 한 것처럼, 너무 성급한 해석을 하곤 해. 211
소크라테스는 그런 식으로 힘 안 들이고 손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어. 그의 작전에 말려드는 실수를 저지른 상대는 여지없이 패했지. 왜냐하면, 예술에서는 내용보다는 감각적인 정서가 주는 매력이 더 중요한데, 감정은 요약이나 축약될 수 없는 거니까....소크라테스는 연사에게 그가 한 말을 요약해달라고 부탁하거나, 핵심적인 내용만 짧게 들려달라고 요청할 구실을 만드는 거지.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사랑의 고백을 합리적으로 핵심만 요약할 수 있을까? 시인이 자기가 쓴 시를 요점난 정리해서 들려줄 수 있을까? 210
인간 본성이란 것은 존재하지않고, 어떤 자연적 사회적 프로그램도 인간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으며, 여자든 남자든 인간에게는 자유롭고 무한한 완성 가능성이 있고, 인종이나 성이 인간을 한정한다는 결정론에 따라 에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동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보면, 일종의 위반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나 규범 같은 종족 공통의 필연적인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래서 동물은 자유도 없고, 스스로 완성해 가는 능력도 없기에, 항상 똑같은 원인에 똑같이 반응하며 살아가지..140
17-8세기 철학자들이 동물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인간과 동물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일에 열정을 쏟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어. 왜냐면, 자신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대상과 비교해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법이거든. 그런데 19세기 위대한 역사가 미슐레는 동물을 인간 보다 저열한 '형제'라고 말했지. 동물은 모든 생물 중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얘기엿어. 그런데 코스모스에 대한 사고가 붕괴하고 종교가 동요하고 인간이 세계와 철학적 사유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인간 고유의 특성에 대한 정의는 지적인 차원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된 거야.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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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일요일 늦잠. 고치처럼 칩거하며 보다 짜투리가 남아 퇴근뒤 잠시 시간이 나 마저 정리하다. 삶 바깥은 없고, 미래란 등 뒤에 서있다. 그렇게 등 뒤에선 것을 보고 우린 늘 희망한다. 그리고 희망이란 것을 낱낱이 발린다. 모임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다. 아무 것도 없다. 희망이나 이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지금이나 지나온 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눈은 있는 것인가? 되돌아볼 수 있는 아픔은 있는 것인가? 희망만 이야기하기에 움직인 것이 없다. 늘 대행만 바라는 우리는 아닌가? 뭔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 새벽 세시가 넘다. 밤은 익을대로 익었고, 질리도록 하얘져 버렸다. 희망은 늘 그러한 것을. 그 전에 지금 꼼지락거림만이 지금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는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그들의 희망으로 지금이 담보잡힐 수 있다는 것을...지금은 기다리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어김없이 오늘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