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란 넘은 원래 딱딱하다. 그래서 대행자들이 나서다보면 그 딱딱함은 정도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래.  그래서 초치는 사람도 필요한게다. 그래야 모임이라는 놈은 혼쭐도 나서 정신을 차리기도 하는 것이리라. 헌데, 초치는 일은 상황이 벌어진 뒤라 본질적인 딱딱함을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보면 모임에 대한 첫인상이나 선입견은 대단한 자정능력을 가진 놈이다. 처음 모임에 대한 기대와 같은 방향성을 갖는 고민들이 꼼지락거리 수 있다면, 그것이 수증기처럼 펄펄 끓어 날라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날개쭉지를 툭 부러뜨려라. 선입견이나 첫인상을 수집하라. 꼼지락거리는 고민들과 함께 함지박같은 오목한 그릇에 모이도록 해보자. 딱딱함의 변두리에 이런 생각시공간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홀로고민들이 팅팅거리다가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팔벌려 섞이게도 하는 방법이나 과정이란 것에 빌미를 줘 보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란 함수에 나자빠진 실망한 고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용도폐기되는 것일까? 모임에 어슷한 각도로 착륙하다 실패한 고민들의 동선은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모임탓일까? 열어주지 못하고 눈치차리지 못하는 모임의 수비대때문일까?  

당간지주처럼 모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지지대가 하나 대각선으로 걸려있으면, 지금은 고민들이 통행가능합니다라구 표시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마 홀로 고민이 한통속같으니 한번 버무려주셔야 합니다라구 색깔을 넣을 수는 없는 것일까?  

고민 전용차로는 없는 것일까?  

홀로 고민들이 가는 길들을 따라가본다. 가다보면 가다보면 우뚝 선 벽으로 둘러친 막막함에 선다. 연어들이 발원한 그곳이 아니다. 너무 딱딱해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곳. 그곳에 들어서는 길은 없는 것일까? 또 다른 홀로고민이 나선다. 그것이 부딛는 지점이 묘하게도 같은 곳이다. 또 다른 정지해있는 것이라는 조직은 다른 생각들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너의 생각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초라도 쳐야하는 것이다. 껍질의 말랑말랑한 곳. 뻘짓이 없으면 자리잡을 수 없다. 뻘에 자리잡는 일들. 홀로고민들이 다다르는 장벽을 넘어 말랑말랑한 그곳의 품은 없는 것일까?  온통 뻘밭인가? 고민의 황량함이 몰려다니고 어쩌지도 못하는 이곳. 말은 들어먹었는지? 귀동냥은 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모임은 다른 곳에만 눈길주고 정신을 딴 곳에 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함께고민을 해본 적이 있는가? 고민마저 색깔도 시선도 똑같은 것은 아닐까? 벽이라고 생각하는 그곳이 또 다른 시작점은 아닐까? 너의 연대로 가는 지점은 아닐까? 겨우 단단한 껍질을 넘어 씨방에 이르는 길. 사유의 시작점은 아닐까? 홀로 고민이 분해되는 지점 호 ㄹ. ㄹ ㅗ. ㄱ.ㅗ. 미.ㄴ으로 바래는 그 지점 너의 고민이 들어설 수 있는 지점은 아닐까? 홀로애정 홀로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외로움의 시간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다시보게할 뿐 아닐까? 함께생각을섞는다는 일. 그 일엔 홀로장벽이 별로 쓸모가 없다. 

그 옹색한 혼자를 서슴지 않고 버려두는 일들. 너로 생각뿌리를 맘놓고 두는 일. 민주주의는 딱딱하지 않다. 딱딱한 그곳엔 민주주의는 없다. 일들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만 하는 곳도 민주주의는 없다. 홀로 고민의 상아탑만 있는 곳엔 권위의 햇살만 비추기 마련이다. 모임을 검은색으로 움직이기 못하게 평론의 공간으로만 두는 것도 재미없다. 비평과 평론의 시선은 늘 저기에 있다. 여기에 있지 못하기에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민주주의는 3차원이 아니다. 위에서 내려보고 올려보는 공간이 아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2차원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내 곁에 너가 이어져 있는 것이고, 기획이란 것이 방향이란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일 것이다. 그래야 겨우 모임이 살아갈 여력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뱀발.  

1. 모임의 한가운데 생각을 여기저기 덧붙여본다. 함민복의 말랑말랑한 힘에 붙여보고, 기형도의 잎에, 마이더스의 검지에도 키워본다. 모임내내 홀로고민에 숨구멍을 두어 여기저기 붙여본다. 모임 중동에 수습된 생각들이지만, 행여 다른 생각들이 자랄까하여 흔적을 남겨두는데 별반 덧붙일 것이 없다. 온전히 모임도 생각도 즐길 수 있는 날이지 않았나 싶다. 스무가지 색깔. 스무명의 입담. 내내 즐겁다. 고민들이 숙성되어 단단한 벽을 뚫고 스며들어 씨앗으로 새 새싹을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설레일까?  

2. 봄의 색으로만 봄을 보면, 봄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새싹이 돋았는지 않았는지 말이다. 겨울의 색으로 가을의 색으로 겨울의 고민으로 가을의 고민들로 서로 섞여야 아주 조금 현실을 인지할 수 있다. 현실은 만만하지 않다. 다른 색과 다른 고민들 사이로 아주 조금 제 모습을 실루엣을 조금 보여줄 뿐이다. 당신이 3차원이 아니라 2차원의 뫼비우스 공간으로 밀착해서 걸어야, 8mm의 속도로 가야 그 담을 넘는지도 모르게 넘을 수도 있는 것인지도... 

3. 근대 100년, 500 날의 함께 함이 이제야 한번 맺음과 매듭을 만든다. 고맙고, 사랑스럽고 행복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따듯하고 편안하고, 함께 살아갈 든든함을 내내 섞다. 나 역시 행복하고 고맙고 사랑한다라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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