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좋아하는 시들은 서정성이 물씬 나는 것 같아요. 이은림이나 조말선...다른 류의 시인들을 좋아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ㅅ이 ㄹ에게)  평소엔 차분하고 좋은데, 가끔 술이 어깨위로 넘어올 쯤, 권위적인 습관이나 태도가 나오는 것 같아. (가나 나에게)(나가 다에게) 점점 각박한 세상살이에 남편은 남의 편이 되어가는 것 같아, 그리고 더 깊이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말이야. 더이상 겹치는 부분이 없을 것 같아. 그것으로 끝이야. 가족의 울타리에서 나란 사람은 무엇일까?(라가 라에게) 당신의 제3자적 시각이 편하기도 한데, 닮아 있는 것 같아 이상해. 아이들과 관계는 그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단말야.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쉽지 않은 것 같아. 문자도 자주허구.(ㅇ이 ㄴ에게) 서울에 있는 국립대와 지방에 있는 국립대 출신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아. (꼬꼬에서 합석자리농담) 누가 나한테 조언하던데 그냥 이대로가 좋아 그래서 난 원래그래라고 했지.(나무카페에서, ㅅ이 ㄱ에게)


이런 대화를 생각의 빨래줄에 널어둔다. 그리고 그 빨래줄에 널린 생각들을 주섬주섬 챙기다가, [멀리있는, 있던 나들]을 가져온다. 도통 이해하기 힘든 동선의 [먼 나]가 조금은 이해될 듯 하면서도 비껴나간다.  삶의 흔적들 속에 먼나를 반추한다.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운 그런 모습들, 그 패턴들. 그 박자들은 나무의 가지들처럼 닮아있다. 울타리 곁을 서성이는 나. 평상심에서 뱉어냈던 나들은 어쩌면 나를 정확히 표현해내지 못해.  이물감이 들고 낯설지만 [먼 나]에게 섞여있는 검붉은 빨강이 나를 표시하는지도 몰라. 그렇게 널린 빨래들. 바람에 흔들리는 다른 색깔들을 보다나니 [먼 나]에 다른 색깔들이 스며들지 않으면 평생 이 몰골의 단조로 살겠다 싶다는 겁이 덜컥나는거다.

그래서 경계에 서성이는 나를 잡아두고 다짐을 받는다.  나란 휴전선의 철책 한 가운데를 오려두어 통행을 할 수 있게 마음 먹는다. 너의 색깔들을 묻혀 색깔이라도 달리내는 것이 어떠냐는 조급이란 물감통을 곁에 두어본다. 생각의 과감은 조금 [더 먼 나]를 넓혀 영토확장이라도 해야되는 것 아니냐구 한다. 아니면 울타리를 바짝 낮추어 너의 파도가 넘어올 수 있도록 하자고 한다. 너들의 야자수 바람이 살랑거릴 수 있도록 당간 문들을 열어두라고 한다. 이렇게 나란 경계에 숨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한 부드러운 통증을 담는다. 그리고 나란 친구를 발가벗겨 냄새피우는 파스처럼 온몸에 덕지덕지 붙여두려한다.  

어쩌면 아픈 줄도 모르던 통증을 찾아 후끈후끈하게 하다가 그 속병을 고쳐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진통을 누그려뜨려 아프던 것을 덜 아프게 해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조말선파스로 다른 모둠의 시인이나 그들의 생각이 말투에 배일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제3자적이란 냉소가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 관조적 파스때문에 2.5자적 파스향에 골몰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느 순간 술이 코끝까지 올라올 즈음 나타나는 파쇼적 습관이 배시시웃는 웃음으로 그칠지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한 가족 안에 새롭게 피는 나로 인해 너도 즐거울 수 있지 않겠는가? 봄날 아지랭이처럼, 봄날이란 잔바람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풍력발전기가 되어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란 휴전선이 열리거나 너로의 장벽이 열려 너-나가 새로움으로 넘쳐 다른 너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학연의 고리가 구멍숭숭하거나 너덜너덜해 바래 삮는 숙명을 목도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뱀발. 모임들 사이 간간이 굳은 너,나를 자극하는 말들이 생각보따리로 스며든다. 예전 같으면 지긋해 하거나, 왠만한 통증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말들일텐데. 한번 모셔본다. 흘려버리지 않고 오목한 그릇에 모아본다. 그리고 하나하나 셈을 하고 등에 붙여본다. 코밑에도 붙여본다. 목주위에도 붙여본다. 헌데 아직도 조말선파스를 보지도 않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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