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둥근 접시 위에 둥근 시계가 놓여 있다/단정하게 식탁 앞에 앉아/칼과 포크를 들고/잘게 시간을 썰어 먹기 시작한다//생선뼈처럼 목에 걸리는 시침과 분침 뱉어버리고/맹렬하게 다가오는 시간을 씹기 시작한다/생피 흐르는 입 가득 넘치는 시간의 살점//축 늘어진 시게의 몸속에서/수많은 나사가 와글거리며 쏟아져나온다/내 혀와 이를 마모시키며 시간이 목구멍 속으로 넘어간다//주름살이 늘어나며 지속되는 하루 이십사 시간의 만찬/접시 주변의 개미들이 하나씩 숫자를 물고 사라지면/둥근 접시는 깨끗이 비워지고/나는 잠자리에 든다//이른 아침/자명종이 울리고 나는 깨어난다/둥근 접시 위에 다시 새로운 시계가 놓여 있다

영화를 보다 말미 전개된 부분인 20년이 겹쳐진 시간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불과 한두달의 시간도 그렇고 이 공간도 그렇다. 시간을 자라게 하고 늘릴 수 있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일상을 낯설게 접붙여 다시 자랄 수 있을까?
그러다 시가 생각난다. 시간의 살점을 배어물어 다시 목구멍으로 넘겨 소화시킬 수 있을까? 다시 낡은 시간의 귀퉁이를 겹쳐 누벼 이을 수 있을까? 앎과 삶을 돌이켜본다. 삶_앎을 돌이켜본다. 꼬깃꼬깃 다시 접고 편다. 펴고 접는다. 삶이 붙어있고 일상이 식목되어 흔적을 남긴 이곳 존재의 공간을 허물기 버겁다. 대면대면 하던 사람들과 고민의 결을 일상의 아픔을 다시 섞을 수 있을까?

앎과 삶, 삶_앎

앎과 삶, 진리, 그리고 끊임없는 되기
자연과학의 진리란 삶의 전체성을 편리에 따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단순화해서 체계화하고 이론화해나간 하나의 방법일 뿐,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해명해주는 진리일 수는 없다.....그에게 진리란 아는 것이 아닌, 사는 일이다. 앎이 따로 있고 사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앎과 삶이 하나로 있는 것이다....자연과학의 실재성이 진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로 이해하며 해석하며 적용하며 자기를 실현하는 이해의 운동이 진리인 것이며, 실천학이며 철학함이다.
주어져 있는 선입견, 전통, 선이해를 계몽주의처럼 배제하기보다, 오히려 이와 더불어 하나로 융해하며 새로움을 나아오는 것으로, 그 권위를 복권시킨다. 그리고 이를 전승, 선이해, 또는 영향작용사라고도 부르며, 마주하는 현실과 더불어 지평 융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평 융합에서 이해의 운동을 해석으로, 적용으로 되풀이 해 설명한다. 다시 말해 영향작용사인 전승과 마주하는 현실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 하나로 이해하는 일임과 동시에 하나로 적용하는 실천인 것이다.....그에게서는 적용이란 아는 것을 차후에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즉 이해와 적용이 동시적으로 하나인 것이다. 이해의 구체적 실현이 적용인 것이다.
이해란 무엇을 알고 모르고 하는 앎의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이해함이 그렇게 존재하는, 이해와 존재가 동시에 하나로 있는 존재론적 차원을 가리킨다. 이해란 죽어 있는 이론이 아닌,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생성적 차원을 지시한다. 이 이해의 무한 운동을 늘 달리 새롭게 자기를 실현vollzug해가는 진리로 해명한다....그래서 가다머는 자신의 철학을 다른 해석학들과 다른 존재론적 해석학으로 규정하며, 실천학으로서의 철학함을, 나아가 삶의 기술로서의 예술의 진리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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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지식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늘 달리 새롭게 끊임없이 실현해가는 무한의 운동이라고 보았다. 진리란 이처럼 실재성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늘 달리 실현해가는 이해의 운동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늘 달리 자신을 실현해가는 존재는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이며,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진리와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를 아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따르는 것도 아닌, 경험하는 것이며, 만나는 것이며, 그것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노는 것이다.
실재성은 실제로 무엇이 실재하는가에 주목한, 사실성은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발생적 차원을 주시한다. 가다머는 이전의 모든 형이상학은 실재성의 차원에서 진리를 개진하려고 했기에 살아 있는 삶의 전체성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
일상과 역원근법
책가도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작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것을 크게 그렸다. 책가도가 있는 방에 앉아 있다고 한 번 상상해보라. 내가 그림 속의 책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 속의 책이 나를 보고 있는 거다. 내가 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님이 나를 보고 있다....역원근법의 소실점은 그림 너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 이쪽에 있다. 아니 어찌보면 소실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소실점의 책읽기와 다른 책 읽기, 죽서독서록엔 선생의 선인이 몇십 년 동안 읽고 또 읽은 책들의 목록과 시기와 그 횟수가 적혀 있었다 
과학으로서 지리학을 지향하는 시선은 의미의 차원에서 공간에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공간의 의미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의 원근법적 공간과 같이 과학적 공간이다. 과학의 공간은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단순화한다. 이는 관점의 단순화와 관련 있다. 이러한 관점은 경관을 인간에게서 분리시킨다. 그 결과 인간의 경험 사실에 대한 왜곡과 빈약화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험자인 인간이 단순화된다는 사실이다...본래 지리학은 강 건너에 누가 살고 있는지, 그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학문이었다. 인간의 삶을 평균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내력을 갖고 살아왔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지를 떠들 수 있어야 한다. 그 공간의 쓰임새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퇴적되어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어야하고, 그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뱀발.
1. 책을 보다나니 생각들이 접히고 습자지처럼 겹친다. 검은 복사지처럼 표면에 새기는 것이 저기 뒷면까지 흔적이 배인다. 서로 떼어내지 않고 통채로 사고 하고 떨어져나간 사람의 향을 배이기에 정신이 없다. 학문은 이미 멀어져 소외된 사람을 수습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주문하는 것이 일상이라는 확대경과 앎과 삶의 구분이 아니라 뒤섞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려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화살표를 갖는 것에 대해 관심을 줄 것을 요구한다. 온몸을 줄 것을 요구한다. 그 새로움이 나에게 붙자마자 대화하고 소통하고 소화시켜 다른 나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일상을 너무 지나치게 해석하고 알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 내몸에 붙여 그만큼 달라진 나를 요구한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 한다.
알라딘마을엔 강건너 사람들이,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림살이가 어떤지 관심이나 있는 것일까? 알라딘서재엔 과연 인문이 있기나 한 것일까? 2. 서재단식을 통해 얻은 것 별반없이 다시 흔적을 남긴다. 이곳 사람들의 연대를 다시 희망하며, 알라딘엔 과도한 희망을 하지 않기로 하고 몸으로 걸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