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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오디세이 일화 - 또 왔구나 나쁜 놈, 이 참견꾼 자식, 우리를 들볶고 못살게 굴고 싶어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심신이 고달픈 결정을 매번 하라고? 난 정말 행복했는데. 진흙탕에 뒹굴며 빛을 쬐고 꿀꿀 꽥꽥 내 멋대로 하면서 '이걸해야 하나, 저걸 해야하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따위의 생각과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왜 왔어? 예전에 살았던 그 끔찍한 삶으로 나를 다시 처박으려고? (오디세우스는 결국 돼지 무리 중 한 마리를 사로잡는 데 성공하는데, 기적의 약초로 한전 쓱 문지르니 억센 짐승가죽으로부터 엘페노를가 빠져나왔다)
우리의 비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생에 걸친 정치적'선택을 하기 위해 마련된 의사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것 같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베풀어진 전대미문의 자유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오래전에 경고한 바대로, 전대미문의 무능을 동반하고 온 것이다.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관리자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캐러밴 생활자들은 불만을 늘어놓으며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동 주택 단지의 관리 철학에 질문을 던지거나 이를 두고 교섭할고 마음 먹는 일은 결코 없다.42
'소비자 스타일의 비판'이 과거의 '생산자 스타일'의 비판을 대체했다고 말할 수 있다.43
오래전에 에르라임 레싱이 지적했듯이, 근대가 시작딜 무렵 우리는 강조와 계시, 영원한 파문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 믿음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우리 인간들은 '우리 소유의'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이는 그 뒤로 ㅇ리가 스스로의 선천적, 후천적 재능이나 좋은 수완, 배짱, 의지, 결단력의 부족함말고는 발전과 자기 개선에 그 어떤 한계가 없었음을 뜻한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의미대로 멈출 수 없다는 것, 가만히 서 있기는 더욱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계속하여 움직여야 할 운명이 되었는데, 막스 베버가 시사했듯이 '만족이 늦추어졌기'때문이라기보다는, 도무지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족의 지평, 수고가 보답 받는 결승점이자 평온한 자축의 순간은 가장 빨리 달리는 선수보다 더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48
'개인화'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 과제를 수행할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는 것이다. 달리 말해 '법적인 자율성(법률적 근거는 없지만 '실제적'자율성이 그만큼 확립되었는가와는 상관없이)이 확립되는 것이다. 53
계급과 젠더가 갱인의 선택권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신을 억압하는 요건들에서 벗어나기란, 전근대 사회에서 '존재의 신성한 사슬'에 이의를 제기한ㄴ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모든 의도와 목표에서 계급과 젠더는 '본성의 일부'였고 다수의 개인들이 자기주장을 하려면 자기에게 할당된 처소에서 유사한 처지의 다른 이웃들이 하는 대로 처신하면서 '어울려야'했다.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과거의 '개인화'는 '성찰적 근대'나 '이차 근대'의 시대, 혹은 '위험사회'에서의 개인화와 구분된다. 55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개인화는 하나의 정해진 운명이지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그 땅에는, 개인화를 피하거나 개인화 놀이에 참여하길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은 단연코 의제에 없다. 개인의 자기만족과 자기충족은 또 다른 환상일 수도 있다. 이제 개인들이 자신들이 겪는 좌절과 고난을 다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56
울리히 벡이 적절하고 예리하게 지적하듯,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바로 체제 모순에 대한 전기적 해법"이 되어버렸다. 사회적으로 위험과 모순은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그것들을 해결할 의무와 필요는 계속 개인 차원의 문제가 되어간다. 57
자유는,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때 오는 것이라고. 개인화의 가마솥에 끓고 있는 자유라는 맛있는 크림 속에는 무능이라는 구역질나는 파리가 빠져 있는 것이다. 57 문제는 개인차원의 고충을 그런식으로 집중시켜 모아서 공동의 관심사로 만들어 공동 행동을 취하는 것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과제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개인의 운명이 떠안고 있는 가장 흔한 고충은 더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충들은 '전부 더하여' 공동의 대의명분의 합으로 이끌어지지 못한다. 서로 나란히 놓일 수는 있겠지만 하나로 응결되는 법은 없다. 58
모든 이들의 삶이 위험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운다. 또 다른 장애물이 있다. 토크빌이 이미 오래전에 의심했던 것처럼,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한다는 것이 어쩌면 그들을 '무관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암시하는 바,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적이다. 59 개인화의 또 다른 이면은 시민의식의 부패와 점진적인 해체인 듯한다. [에스프리]지의 공동 편집자인 조엘로만은 그의 최근 저서 [개인의 민주주의]에서 "경계는 선에 대한 감시로 퇴락한 반면, 전체의 이해는 집단적인 감정과 이웃에 대한 공포심이 가져온 이기주의의 조합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로만은 눈에 띄게 부족해진 "함께 결정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공적인 것들'은 '사적인 것들'에 의해 식민화되었다. '공공의 이해'는 공적인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 격하되고, 공공생활의 기술은 개인사의 공개적인 나열과 사사로운 감정의 공개적 토로라는 협의의 의미로 축소되었다. 60
공적무대에 오르는 것은 공공의 선 혹은 공동의 삶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대한 절실한 필요이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건설하는 기술은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지고 오락가락하는 정서적 반응들처럼 나약하고 단명하는 '공동체들'을 양산한다. 그 공동체들은 변덕스럽게 한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이동하며 정착할 항구를 찾아 결론이 나지 않는 탐색을 하며 영원히 떠도는 배와 같다.61
매일같이 자기 책망과 자괴감을 느낄 위험을 떠안고 사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만 시선을 맞추고 있는 탓에 개인적인 삶의 모순들이 집단적으로 빚어낸 사회 공간에서 주의를 돌린 개인들은 당연하게도 자신들이 처한 비극의 원인을 명백한 어떤 것, 따라서 개선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곤경의 복잡성을 애서 축소하려 한다.....법률상의 개인의 여건과 실제 개인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진정 바라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 사이에는 엄청나게 넓은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의 개인들의 삶을 더럽히는 가장 유해한 악취가 뿜어나오는 곳도 바로 이 깊게 드리운 간극의 심연에서이다. 그러나 이 간극은 개인의 노력, 개개인이 스스로 꾸려가는 생활정치 안에서 얻는 수단과 자원을 통해서는 메워질 수 없다. 64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떤 사유도 소통으로부터 면역되지 않느다. 그리고 잘못된 장소와 잘못된 동의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설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유에 담긴 진실을 침해하기에 충분한 것이다...이제 지식인들에게는 불가피한 고립만이 그나마 연대감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초연한 관조자라고 해도 적극적인 참여자만큼이나 깊이 매여 있다. 관조자가 지닌 유일한 특권은 자신의 매여 있음에 대한 통찰과 그런 깨달음이 선사하는 눈곱만큼의 자유이다. 68
사유하는 자에게 망명은 순진한 이들에게 집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사유하는 사라므이 초연함. 그의 일상적 생활방식이 생존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망명 속에서이다. 70 사유하는 삶과 행동하는 삶 사이의 딜레마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점에서만 닮았다고 할 두 가지 전망 중 택일을 하는 문제로 응축된다. 사유를 통해 유지되는 가치들을 타락으로부터 잘 보호할수록 그들의 삶에 봉사해야 할 그 가치들이 그들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꾸만 축소된다. 그 가치가 그들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클수록 혁신을 촉구하고 장려했던 가치들에 상응하는 개선된 삶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71
새로운 의제는 앞서 논의한 바, 법률상 개인과 실제 개인 간의 간극, 혹은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부정적 자유'와 보편적으로 얻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절대적 자유'-달리 말해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새로운 조건은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인의 반란을 이끌었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79
비판이론은 새로운 청중을 맞이한다. 계몽군주가 그 권좌와 응접실을 빠져나가자 빅 브라더의 유령이 이 세상의 다락방 구석과 지하 감옥을 떠돌기를 멈추었다. 새로운 액체 근대에서, 계몽군주와 빅 브라더는 둘 다 엄청나게 작아진 모습으로 각 개인의 생활정치의 자그마한 축소판 소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바로 이곳이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위협과 기회-이러한 자율성은 자율적 사회 안에서가 아니면 그 온전한 실현이 불가능하다-가 발견되고 자리잡아야 하는 곳이다. 공동의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일은 생활정치의 대안을 고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83
개인성
최근까지는 여호수아 담론이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으나, 현재에 이르러 창세기 담론이 점차 이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드리프트가 시사한 바와는 정반대로, 기업과 학계이 바로 그 동일한 담론 안에서 오늘날 세상을 꾸려가는 이들과 세상을 해석하는 이들이 서로 만나는 일은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새롭고(드리프트는 '부드러움'이라 칭했다.) 지식 탐욕적인 자본주의한테는 별로 놀라울 게 없는 특색이다. 91
새로운 상황에서 어려운 점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돌아볼 것도 없이 자명한 목적들을 위한 수단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선택랄지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보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의 자본주의와 대조적이게도, 가벼운 자본주의는 가치-강박적일 수밖에 없다...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어떻게든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제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왜소화시키고 밀어내버렸다. 99
외견상 무한한 기회(적어도 우리가 시도해볼 만하다고 여기는 것보다는 많은 기회)속에 산다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될 자유"의 달콤한 향을 풍긴다. 하지만 이 달콤함은 뒷맛이 쓴데, '된다'는 것은 어떤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저 앞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된다는 것이 확고히해주어야 할 '대단한 존재가 된' 그 상황은 경기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호각 소리, '종료가 되면 당신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네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그 순간 너는 너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미완과 불완전함, 미결정의 상태는 위험과 고뇌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상황이 순전한 쾌락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활짝 열려 있는 자유의 앞길을 사전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101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상은 날카로운 미각의 소유자가 전부 맛보기에는 군침 도는 요리가 너무나 많이 차려져 있는 뷔페와도 같다. 먹는 사람들은 소비자이고, 소비자들이 당면한 가장 버겁고 짜증나는 시련은 무엇을 먼저 먹을까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미개척 상태에 있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그것을 미개척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할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소비자의 불행은 선택의 결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과잉에서 비롯된다. 102
'사회가 없다'는 것은 유토피아가 없고 디스토피아도 없음을 의미한다. 가벼운 자본주의의 구루인 피터 드러커가 말한 대로, '더 이상의 사회적 구제는 없다.' 이 말은 함의상 파멸에 대한 책임이 사회의 문 앞에 놓여서는 안 되며 구언이나 파멸이 모두 너 자신이 할 탓이고 오로지 너 자신만의 관심사-자유로운 주체인 네가 자신의 삶에서 자유롭게 행동해온 것의 결과인-라는 것을 시사한다.104
수단이 엄청나게 많지만 목적에 관해서는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그러한 세상에서는 토크쇼에서 끌어낸 교훈이야말로 진정한 수요에 답을 해주는 부정할 수 없는 실용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는 내가 내 인생을 최상으로 만드는 것은 나한테, 오직 나한테만 달린 문제라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에게로 모든 방향을 돌리는 것이 어떤 자원을 요구하든, 그 자원은 오직 내 자신의 기술과 용기, 과감한 속에서 찾을 수 있기에 똑같은 도전에 처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109
많은 사상가들(하버마스)은 '사적 영역'이 '공적인 것'에 의해 침해당하고 정복당하고 식민화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그러나 이런 예감은 안 맞는 안경을 쓰고서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읽어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실상, 그 경고와는 정반대의 경향이 현재 일어나는 듯하다. 즉, 과거에는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대중적, 공개적 표출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문제들이 공적 영역을 식민화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인 드라마가 상연되거나 공개적으로 전시되고 관람되는 영역으로 재규정하는 문제이다. 112
일련의 '공개적 스캔들'(즉, 공적인 인물들이 사생활에서 저지른 도덕적 방종을 대중이 알게 된 것)에 타격을 입고, 토니 블레어는 "정치가 가십 칼럼으로 축소되었다."고 불평하며 독자들이 다른 대안을 봐야한다고 주문했다. 114
아무리 많이 실망해도 고백하는 습관을 바꾸거나 이를 원하는 욕구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하지만, 결국 개인들이 각자 그들의 개인적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고 개인 각자의 기술과 재능을 사용해 그 문제들과 씨름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공적 현안'이며 '공적 관심'의 유일한 대상이다....머리를 맞대고 대오를 좁혀 발맞추어 행진해야만 사적 불행이 치유될 수 있다는 훈계와 설교에 마음을 기울엿을 때와 똑같은 열정과 희망으로, '그들과 같은' 타인들의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기를 계속할 것이다. 116
'유효기간'이 붙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한이 되기도 전에 잘 쓰이지 않게 되고, 위축되며, 가치가 떨어져서 '더 나은 신상품'과 경쟁할 때는 완전히 그 매력이 사라지게 된다. 소비의 경주에서는 가장 빨리 달리는 주자보다도 결승점이 늘 더욱 빠르게 달아난다. 하지만 트랙을 달리는 대부분의 주자들은 너무나도 처진 근육과 지나치게 작은 폐를 가지고 있어서 빨리 달리려고 해도 달릴 수가 없다. 117
쇼핑은 음식, 구두, 차량, 가구 등속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새롭고 개선된 인생의 본보기나 비결을 열심히, 끝없이 찾는 것도 쇼핑의 한 단면이며, 다음의 한 쌍의 교훈, 즉 우리의 행복은 개인적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 그러나 개인들은 무능력하거나 혹은 열심히 노력했을 때조차도 마땅히 갖춰야 하고 갖출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겠다. 118
소비상품들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소비자주의의 양태는 하비 퍼거슨이 이야기한 것처럼,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토대로"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하는 환상을 해방시키는 것을 토대로"한다. 퍼거슨에 따르면 욕망 개념은
소비를 자기표현, 그리고 취향과 차별성이라는 개념과 연결 짓고 있다. 개인은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다. 그러나 상품의 지속적확대에 전념하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입장에서는, 이는 매우 협소한 하나의 심리적 틀인 바, 결국에는 사뭇 다른 심리적 '경제'에 무릎을 꿇는다. 소망은 욕망을 대신하여 소비를 자극하는 힘이 된다. 121
욕망의 용이함이 비교와 허영, 질시, 그리고 자기 찬미에 대한 '필요'를 바탕으로 하는 곳에서는, 그 소망의 즉시성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매는 우발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며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구매는 어떤 소망을 표현하는 동시에 실현하는 환상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소망과 마찬가지로 진지하지 않고 유치하다. 122
소비자의 몸
생산자 역할을 위주로 조직된 삶은 규범적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살아 있기 위해, 그리고 생산자의 역할이 어떤 것을 요구하든 이를 행할 수 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최저선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포부가 사회적 동의를 얻는 것에 의존하는 과정에서, 어떤 꿈을 꾸고 갈망하고 추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상한선 역시 존재하게 된다. 그 한계를 넘어선 모든 것은 하나의 사치이며 사치를 바란다는 것은 죄악이다. 따라서 순응이 주된 관심사가 된다. 123
건강과 균형 잡힌 몸매는 두 개의 아주 다른 담론에 속하며, 매우 다른 관심에 호소한다. 생산자 사회의 다른 모든 규범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건강은 '정상'과 '비정성'간의 경계를 긋고 이 경계를 지킨다. '건강'은 인간 육체와 정신의 적절하고 바람직한 상태이다...이와 정반대로 '균형잡힌 몸매'는 전혀 '고체적'이지 않다. 그 속성상 균형잡힌 몸매는 정확하게 꼭 집어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그것은 종종 "오늘 기분 좀 어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진정한 시험은 언제나 미래에 있다....건강이 '더도 덜도 아닌'식의 상태라면, 균형 잡힌 몸매는 영원히 '더'쪽으로 열려 있는 상태로 머문다. 균형 잡힌 몸매는 구체적 기준의 육체적 능력은 전혀 지칭하지 않고, 그 능력의 확장 가능성을 지칭한다...주관적 경험이다. 124 균형잡힌몸매를 얻으려는 이들이 확신하는 한 가지는 그들이 아직은 충분히 균형잡힌 몸매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구는 영원한 자기검열, 자기책망, 자기비하 그리고 끊임없는 고뇌 상태가 된다.126 건강관리는 원래의 속성과 다르게, 불길하게도, 균형 잡힌 몸매를 추구하는 것과 자꾸만 닮아가고 있다. 균형잡힌 몸매의 추구는 계속적이며, 결코 완전한 만족을 가져오는 법이 없고, 현재의 진행 방향이 제대로 된 것인지 불확실하며, 추구하는 중에 수많은 불안을 야기한다. 127
액막이의식으로서 쇼핑
개인화된 소비자 사회에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은 '스스로하라(diy)'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쇼핑말고 다른 그 무엇이 '스스로하는'액막이 의식의 필요조건들에 그토록 잘 부합할 수 있단 말인가? 131
맘껏하는, 혹은 그렇게 보이는 쇼핑
에프라트 체엘론이 언급한 대로, 유행이 그토록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보다 더 약하지도 더 강하지도 않은 딱 알맞은 재료이다. 유행은 "행동에 참여하지 않고도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감당하지 않고도 그 극한을 밟아볼 수 있는 방법이다. 133
제레미 시브룩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상품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점점 상품에게 배달되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성격과 감수성 자체가 상품들과 경험들, 감정들에 대략적으로 어울리는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개조되어 이것들을 판매함으로써만 우리 삶의 윤곽이 드러나고 의미가 생기게 된 것이다. 137 아이러니의 시대는 가고, 겉모습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거으로 신성시되는 매력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근대성은 따라서 진정한 자아의 시기를 거쳐 아이러니한 자아의 시대로, 그리고 다신 연합적 자아라고 이름 붙여질 법한 오늘날의 문화로-즉 내적인 영혼과 사회관계가른 외적인 형식 간의 유대를 끊임없이 헐겁게 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정체성은 끊임없이 동요한다. 140
따로 떨어져서 우리는 쇼핑한다.
쇼핑중독자들의 사회가 지극한 가치로 추켜세우는 그러한 자유는 그 자유가 명백히 겨냥하는 사람들보다는 이를 별로 탐탁치 않아하는 방관자들을 더욱 황폐하게 만든다. 142 '쇼핑하고 다니는' 식의 삶으 특징짓는 정체성의 이동성과 유연성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고, 자유의 재분배이다. 때문에 이러한 삶은 절반의 축복이라 하겠다...소르본의 철학자 이브 미쇼의 표현대로 "기회들이 과도해짐에 따라 파멸과 파편화, 해체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다." 자기정체성을 찾는 과제는 첨예하게 분열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이 과제가 갈등의 초점이 되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충동들을 촉발한다. 모두가 이러한 과제를 떠맡게 되지만, 문제의 해결은 각 개인들이 대단히 다른 환경에서 제각기 구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협력과 유대를 발생시키는 쪽으로 인간 조건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인간의 처지들을 분할하고 흉포한 경쟁을 야기하는 것이다. 145-6
시공간
공적 공간이면서도 예의바르지 않은 두번째 공간: 소비자들은 흔히 별다른 실제적 사회 교류없이도 콘서트나 전시 공간, 휴양지, 스포츠 공간, 쇼핑몰, 매점 등과 같은 물리적 소비 공간을 서로 공유한다. 그러한 공간들은 상호적이지 않은 행위를 장려한다. 158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불가피하다고 할 만남이라는 것들도 그러한 목적을 방해한다. 만남은 짧고 깊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만남은 행위자들이 희망하는 한도 내에서만 지속되고 깊어져야 한다. 그곳은 이러한 규칙을 깨기 쉬운 사람들을 잘 막아내고 있다. 관리 감독이 철저하게 되는 소비의 사원은 거지, 부랑자, 스토커, 떠돌이 들이 없거나 혹은 없을 것으로 기대되는, 홀로 떠 있는 질서의 섬이다. 158-9
뱉어내는 장소들, 먹어치우는 장소들, 비장소들, 그리고 빈 공간들
소비의 사원으로 가는 여행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그러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친근한 공간이 경이롭게 탈바꿈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예 다른 세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소비의 사원은 도시 안에 있지만 상징적으로 도시의 경계 바깥, 도로에서 먼 곳에 세워진 게 아니라면 도시의 일부는 아니며, 일상적인 세상이 일시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160
그들의 사원 안에서 쇼핑과 소비를 하는 사람들은 바깥세상에서 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구했지만 얻지 못했던 것들을 찾을 수 있다.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위안의 감정, 안락한 소속감 말이다. 세넷이 지적하듯 차이의 부재, '우리는 모두 같다'는 느낌, '우리는 한마음이므로 어떤 협상도 필요 없다'는 가정이야말로 삶의 무대가 복수화되고 다성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증가하는 공동체 개념의 궁극적 의미이며 공동체가 지닌 매력의 궁극적 원인이다.164
우리 시대의 위대한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인류의 역사에서는 타인의 타자성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두 전략이 사용되었다고 언급했다. 하나는 '뱉어내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먹어치우는' 전략이다. 164
비장소들에서 어떤 일들을 해야하고, 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마치 집에 잇는 것처럼 느껴야만 한다. 정말로 집에서처럼 행동해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비-장소들은 "정체성, 관계,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없는 공간이다. 예컨대 공항이나 도로, 익명의 호텔 방, 대중교통이 그것들이다. 역사적으로 오늘날처럼 비-장소들이 그토록 많은 공간을 차지한 적은 없다." 167
이방인에게 말걸지 마라
정치 영역이 공적 심경 토로의 장으로, 친밀함을 공적으로 전시하거나 사적인 미덕과 악덕들을 공적으로 검토하고 검열하는 장으로 좁혀짐에 따라, 정치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려하는 대신 공적 무대에 모습을 비추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살기 좋고 정의로운 사회의 전망이 정치적 담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행동이 아닌 의도와 감정만을 소비할 것을 권하는 정치적 배우를 바라보는 수동적 관객이 되었다. 175
시간의 역사로서 근대성
시간은 길게 늘이는 것이 불가능한 웻웨어나 인간의 조작이 불가능한 풍력이나 수력 같은 지독히도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하고 만들고 적용하고 사용하고 통제하는 일종의 하드웨어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은 꿈쩍하지도 않고 바꾸어볼 도리 없는 땅덩어리나 바다와 같은 것과는 무관한 요소가 되었다. 시간은 공간과는 달랐는데, 이는 공간과는 다르게 시간은 변화와 조정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181
무거운 근대로부터 가벼운 근대로
게오르크 짐멜이 언급했듯이 모든 가치는 그 가치들이 다른 가치들을 멀리해야만 얻어지는 것일 때 가치 있는 것이 된다. 특정한 것들을 획득하려고 우회하는 것이 그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도록 한다. 사물은 노력을 들인 만큼 가격이 매겨진다....시-공간 관계에 적용된다면 모든 공간 구석구석까지 동일한 시간 범위 안에(즉 순식간에)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대문에 특권화되거나 특별한 가치를 지닌 공간은 사라졌다. 191
유혹적인 '존재의 가벼움'
경영 차원에서의 이러한 지방흡입술은 경영 기술에서 가장 으뜸가는 전략이 되었다. 그러한 흡입술을 주요하게 적용한 것이 감량, 감원, 단계적 철수와 폐업 혹은 특정 단위의 매각 등이다. 시간을 잡아먹는 감독의 번거로움을 감수하느니 노동자들 스스로 생존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더 값싸게 먹힌다. 197
경쟁게임에서 질 수도 있다는, 따라잡힐 수도 있고 뒤에 남겨지거나 시장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만으로도 합병/감원 게임이 계속되기에 충분하다. 이 게임은 점차로 게임 그 자체를 위한, 그 자체를 상으로 하는 게임이 되고 있다. 아니 차라리, 게임은 그 속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보상이 되어, 왜 그것을 하는가 하는 목적은 필요 없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9
순간적인 삶
불멸성의 퇴락은, 다소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인류의 문화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라 할 문화적 동요의 징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고체 근대에서 액체 근대로의 이행은, 적어도 신석기 시대 이후로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이정표로 여겨졌던 자본주의나 근대의 도래보다도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이러한 시간의 새로운 즉시성은 인간의 공존 양식을 바꾸어놓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인간이 공동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혹은 때에 따라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방식), 인간이 어떤 일들을 공동의 일로 만드는 방식(혹은 그렇게 하지 않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유권자들이 고객과 매우 비슷하고 정치인들이 기업인들과 매우 비슷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한때는 동굴인간들이 '내일을 발견한'적이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배워나가는 만큼이나 망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기억이란 것도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내일 만나게'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며, 게다가 내일 만나게 될 우리는 바로 얼마 전 만났던 그 우리가 아닐 수도 있다. 사태가 그러하다면 신뢰성과 믿음의 나눔은 자산일까 부채일까 203-5
즉시성의 시대에 '합리적 선택'은 결과를 회피하면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결과가 내포하고 있는 책임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즉시성의 도래는 인간이 문화와 윤리를 미답의 발견되지 않은 영역으로 이끌며, 그곳에서는 이제껏 학습되어온 일상의 습관이 그 유용성과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기 드보르의 유명한 주장처럼, "인간은 자기 조상들을 닮은 것보다 자신의 시대를 더욱 닯는다." 그리고 오늘날의 남녀는 그들 부모와는 다르게도 "과거를 잊고 싶어하며 이제 미래도 믿지 않는 듯한" 그러한 현재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껏 긴 시간동안 책임을 지는 것과 순간을 사는 것을 이어줄 뿐 아니라, 순간성과 지속성을, 인간이 지닌 필명성과 그가 이루어낸 성취의 불멸성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해온 것은 다름 아닌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신뢰였다. 206-7
일
진보 그리고 역사에의 믿음
가장 심오하고 아마도 유일한 진보의 의미는 두가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믿음,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믿음과 그리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라는 믿음으로 구성된다. 이 두가지 믿음은 공존 공생한다. 그리고 이 둘의 공존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어떤 일을 이루어지게 할 힘이 있는한 계속 유지된다. 214
진보라는 근대의 로멘스, 즉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고, 지금보다 더 많은 만족을 얻게 될 것이며, 그렇게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조만간 끝날 것 같지도 않다. 근대성은 오직 '만들어가는' 인생밖에 모른다. 근대의 남녀 개인들에게 삶이란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혹독한 과제, 엄청난 집중과 새로운 노력을 요하는 과제인 것이다. 액체 근대나 가벼운 자본주의 단게에 인간 조건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양식에 원기를 부여하였다.....그러나 만일 현재 체현된 진보 개념이 너무나 생소하여 그것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머물고 있는지 궁금해진다면 이는 현대적 삶의 다른 매개변수들처럼 진보 역시 '개인화'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좀더 핵심을 말하자면 진보 개념에서 공적인 성격이 빠져나가고 사적인 것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 그것은 이제 공적인 성격이 사라졌다....그것은 개선이란 문제가 이제 집단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기획이 되었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되었다.219
물리학에서 드러나는 혼돈의 예들은 어떤 역동적 상황이 평형상태로 가지 않고 일시적인 혼돈과 예측 불가능한 발전을 촉발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입법자들과 주요 관료들은 더 나은 평형상태를 창출하고자 하는 그들의 결정이 의도와는 다르게 격력하고 예측 못한 진동,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진동을 창출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21
일은 질서를 세우고 미래를 통제하는 세상에서 게임의 영역으로 떠내려왔다. 일하는 행위는 조심스럽게 단기적 목표를 세워 그저 한두 걸음만 앞으로 내딛는 게임 참가자의 전략처럼 되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마다 얻게 되는 즉각적 결과로, 그것은 바로 그 현장에서 소비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유명한 사이버 두더지처럼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전기소켓을 찾아 돌아다니는 법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돌아다니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경우와 기괴하게도 닮아 있는...일은 더 이상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사명을 지니도록 원대하게 계획된 것도 평생의 천직이라는 웅장한 의도를 지닌 것도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의 성격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땜질'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 종말론 적 올가미가 벗겨지고 형이상학적 뿌리가 잘리고 나니, 일은 고체 근대와 무거운 자본주의 시대를 지배하던 가치들의 집합체 속에서 부여받았던 중심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일은 윤리적인 생산자요 창조자라는 프로메테우스적 천직의 의미가 아닌, 감각을 추구하고 경험을 수집하는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고 측정된다. 223-5
노동의 부흥과 쇠락
대부분의 경제사가들은, 부와 소득 수준에 관한 한 절정기에 이르렀던 문명 간에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1세기 로마나, 11세기 중국, 17세기 인도의 부의 정도는 산업혁명 진입기의 유럽의 부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18세기 서유럽의 일인당 소득은 그 시기으 인도나 아프리카, 중국의 일인당 소득의 30퍼센트 정도밖에 높지 않았다. 227
여담: 미루기의 간략한 역사
일의 윤리가 지연을 무한정 연장시키는 쪽으로 내몰렸다면, 소비의 미학은 그것의 폐지를 강요하고 있다. 조지 슈타이너가 말했듯이 우리는 '카지노 문화'속에서 살고 있다. 카지노 안에서는 '더 이상 가지 마라'라는 외침이 미루기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그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보상을 받아야 하는 행동이 있다면, 그 보상은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 카지노 문화에서 기다림은 결핍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 결핍을 충족하는 것 또한 단시간에, 즉 다음 한판이 돌아갈 때까지는 끝나야 하며 기다림만큼 짧은 수명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욕망에 연료를 보급하고 재충전시키기는 커녕 질식해버리고 말 것이다 253
유동적 세상에서의 인간의 유대
변덕스러움, 불안정성, 진입의 용이성은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삶의 조건들의 특색이다. 프랑스 이론가들은 불안정성을 말하고, 독일 이론가들은 불확정성과 위험사회를, 이탈리아 이론가들은 불안을, 영국 이론가들은 불안정을 말한다. 256
우리 시대의 남녀를 특징짓는 냉소주의를 개탄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냉소주의가 그것을 부추기고 요청하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관련된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 로마에 불이 났는데 불을 끌 방법이 없을 때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일이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딱히 더 바보짓도 아니고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믿지 못할 사회 경제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남녀 개인들은 이 세상을 일회용 물품들, 한번 쓰고 버리는 물품들이 가득 담긴 용기처럼 보는 훈련을 하고 있다.(혹은 아주 어렵게 터득하고 있다.) 게다가 세상은 용접으로 밀폐되고 땜질로 막아버려, 파산을 해도 수리할 수 있기는 커녕 사용자가 절대로 열어보지 못할 블랙박스처럼 되어 있는 듯한다. 258
유대와 동반 관계는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은 다른 소비 대상들과 같은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소비시장에서 겉으로 오래갈 듯 보이는 상품들도 통상 '시험 사용기간'이 주어진다....인간의 유대가 다른 모든 소비대상과 마찬가지로, 기나긴 노력과 간헐적인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매 즉시 눈 깜짝할 사이에 만족을 얻기를 기대하는 대상이라면...동반 관계를 잇기 위해 불편과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은 고사하고 뼈빠지게 노력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조금만 비틀거려도 동반 관계는 무너지고 깨질 수 있다. 260
자기 영속화된 확신 부재
지구상의 선진화된 지역 전반에서 노동운동이 쇠퇴해버린 끔찍한 난국을 그저 대중적인 분위기가 변한 것으로 설명해버리고 마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도 않다. 엄청난 실책을 놓고 이를 노동정치가들의 양면성 때문이라고 탓해보았자 소용없다. 삶의 맥락과 사람들이 살아온 사회적 배경이 변화했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대량생산 공장에 모여 자신들이 노동력을 파는 기간을 보다 인간적이고 값어치 있는 시간으로 개선하기 위해 대오를 강화하고 좋은 사회에 대한 갈망 - 이제 막 시작되어 아직은 뚜렷한 목소리를 얻지 못한(그러나 선천적으로 결국에는 세상을 압도하게 될)-을 감지했던 시대가 근본적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런 설명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이다.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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