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애인. 아래 몇편을 옮기다가 한자를 옮기지 말까도 했는데, 한편의 시의 운율처럼 읽히지만 그 무게란 감당하기 두려울만큼 묵직하다. '한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거나 '재물을 사유하는 것은 자기와 남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

패턴.흔히 평범하게 스치는 생각들을 선명히 차별없이 투시한다. 그래서 그 굴곡은 어김없이 드러나게 되는 듯 싶다. 친밀함의 농도는 좋아함의 농도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공평함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친밀함에 자연스럽게 은근슬쩍 넘어가는 불평등의 논리를 치밀하게 끌어내리는 듯 싶다.   하물며 귀신에게 젯상을 더 화려하게 차리고 복을 더 구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더 베푸는 마음의 과도를 경계하게 한다. 이러한 지적 패턴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 친밀함에 차별을 둔다면 >>



(나)만과 (너)도의 차이. 인이란 체애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마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고 재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는 잣대의 눈금과 같고, 공동체의 일부분이고 겸을 나눈 것이다라 한다. 2500년의 서양철학의 시작이 개인을 추스려내고 그 개인으로 모든 사고를 규정짓는 것이었다면, 그 개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 않았던 것들은 어떤 이유때문이었을까? 그 성찰하는 사고의 근원은 어떻게 잡고 있을까?  

개인을 나누고 위계를 나누는 순간. 사고와 행동의 편리는 가져왔을지언정, 정작 보이지못하는 것은 있지 않았을까?  잣대의 한눈금. 눈을 가린 것은 자기만을 위한 나르시스의 철학이었다는 지적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무서움이나 보지 못한 것이 동시에 2500년 전의 일이다. 똑같이 노예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논리가 광범위하게 회자되고 있었음에도 그 회자된 모든 것은 불에 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소피스트의 논리를 궤멸한 것처럼 묵자의 논리도 궤멸된 것은 아니었을까? 평범하기 그지없는 문구를 따라가지만 떨린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겸이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별이다.' 어쩌면 자기만 사랑했던 아둔함이나 별로 위계를 세우려는 노력의 누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위주로 사랑한다는 것은 >>


운명과 구별의 말로. 운명론과 차별의 논리는 백성을 낙담하도록 유세하는 것이라한다. 작금의 현실과 다를 바가 있을까? 사람을 구별짓고 은연중에 사해동포가 다 다른 것이라 구별짓는 우리는 운명론과 순박한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일만 하고 있는 현실은 아닌가? 너무도 당연한 듯 별을 비난하고 겸을 옳다하는 것을 서로 협력하는 비유를 들고 있다. 어디 따로 잘라쓸 것이 없이 너무 평이하다.

>> 숙명론과 낙담의 전염 >>

로고스의 기준점. 군사부, 차별, 유별, 삼강(오륜 )에 비교해 삼표의 지표를 삼는다. 말이란 것이 순환하듯 미끄러져 자칫 그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현실에서 분간을 할 수 없게 만들기에 그 기준점을 둔다. 저기 뜬구름의 현학이 아니라, 관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 말의 출발이 두루 이익을 주는지, 현실의 눈으로 사고 하는지, 지난 궤적들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 태초에 말이...>>

천하무인. 천하에 남이란 없다. 남의 몸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남의 집안도, 남의 나라도 내 나라처럼 생각하라. 겸애와 이익을 교환하는 교리는 저기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함을 요구한다. 저울처럼 끊임없이 선취하고 버리는 것에 모아둠이 없다. 사랑을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는다. 미루지도 않는다.

>> 천하무인 >>

기다림과 구별의 빗나감을 말하지 않는다.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 사이 사랑은 왜가 붙지 않는다. 나도 너도, 그리고 그 판별은 너무도 쉽다. 이롭게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누구나 판별할 수 있다. 후하거나 박하거나, 진하거나 묽거나, 많거나 적거나 하는 논리는 모두 차별을 전제로 한 자기만을 사랑하는 일이다. 말로만, 몸은 그 머리에 볼모로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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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나 민주주의도 어쩌면 다시 사고의 끈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죠. 실타래를 풀기엔 너무 시간이 걸리고 풀 수도 없을지 모르죠. 문턱을 두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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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앞의 서문에 놀라고, 늦봄문익환목사님의 편지글에 다시 한번 놀란다. 이탁오선생의 삼교귀유나 노자나 공자나 ....루쉰과 함께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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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편지 말미 서운함을 표현하시는 것이 어찌 기대승과 퇴계선생의 글과 아쉬움을 보는 듯하다. 알아주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투정부리는 모습이 어찌 귀여운? 구석까지 있어 보인다.(혼날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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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1. 내려오는 길, 덧글을 달고 있는데 접속도 되지 않구 말썽이다. 그나마 덧글 흔적이 남아있을까 했는데 날림저장 모습도 찾을 길이 없다. 이렇게 기억을 되살려야 하나. 아쉽다. 
 

2. 기독교에 대한 관점은 폴라니, 언약으로 개념을 뒤흔들고 넓힌 색스이 책,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소개하는 책자가 생각난다. 

3. 기세춘선생님과 갑장이신 홍근수목사님의 반론도 보완이 된다. 무례한 나같은 반신론자에겐... 3. 무례와 겉넘음을 범하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양해를 바라면서 도를 넘는 수사를 해본다. 4. 늦봄의 생생하던 목소리가 그립니다. 휫날리는 머리결부터... 조금 가다듬어야겠다. 감안하시고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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