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홀로지식인의 습속] 지식인들은 자신의 앎을 자장으로 해서 자신의 자장안으로 앎들을 숱하게 끌어들이려 한다. 그 욕망에 못지 않게 그로 인한 보수성은 자칫 그늘들을 만들어 놓지 않거나, 일리의 공간들을 놓아두지 못하는 것과 상통한다. 이 습속은 자칫 연대가 아니라 투쟁의 국면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기에 다른 가지나 다른 생성을 지레 소멸시키는 위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앎이란 것도 집중의 강렬한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 자신의 앎의 경직과 다른 자장을 가질 수 있다는 점. 오히려 생성이 자신의 앎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시간에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여백이 자랄 수 있다면, 자라지 못하고 움찔대는 새순이나 새싹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키우거나 자라게 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지식인들도 구획이나 편집증에서 조금 벗어나 앎의 연대를 기획할 수 있는 여력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을 보면 지식인들이 앎의 향기엔 강한 앎파라치이긴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집과 경직에 대한 성찰의 문은 열려있지 못하다. 그래서 열이면 아홉이 머리는 커지나 몸이 단단히 굳어 더 이상 앎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이비로 전락하는 모양이다.
#2. [삶의 지수] 퇴근길, 매체언론은 출산율이 세계최저라구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 말이다. 어쩌구저쩌구 통계를 들먹이며, 분석을 들먹이며, 아침에 언론에 나온다는 소리가 기껏 초등학교를 1년 일찍 보낸다라구. 귀신신나락먹는 소리인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살율도 세계최고이고, 삶의 지수도 상대적으로 최악으로 달리고 있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애꿎은 엄마를 볶을 것이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들볶을 것이며...거기에 애국심까지 거들먹거리며 개인의 문제로 가닥을 잡지 않을까 우려된다.
삶의 나락이 왜 이렇게 형편없이 떨어졌는지? 아이도 어른도, 노후도 눈에 잡히게 하는 것이 최악의 서사밖에 없다. 그런 나라에서 누가 아이를 낳는단말인가? 형편없는 위정자는 아무걱정없어서 그런가? 그렇게 출산율에 관심이 많다면, 삶의 지수가 왜 이렇게 곤두박질 쳐져 있는지? 다른 사회가 받아들이는 완충장치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왜 그렇게 노처녀만을 마녀사냥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인지?
노후도, 아이들 키우는 것도, 집도 그저 풍족하지 않지만 살만하다면 누가 아이들키우기 싶지 않을 것이며, 일터도 젊은이에게 물려주고 노후를 즐기려할 것이며, 하다못해 집이 투기 목적이 아니라 오붓하게 살 요량을 할 것이다. 하다못해 교육비에 한숨짓겠는가? 엉뚱한데 손가락질하지말고 그 손가락을 네얼굴에 대길 바란다. 위정자도 국가도, 그 녹을 먹고사는 친구들도, 세상사는 일을 연결짓지 못하는 우리들의 아둔함도... ...
#3 [시간의 각질과 훈육된 허물] 훈육된 애벌레, 나를 키워온 30-40년, 이제야 내 생각도 마음도 자라고 키워진 것을 돌아보니 고스란히 훈육된 애벌레란 느낌이 든다. 생각이 자라는 것도 그 훈육의 결과이며 훈육의 울타리 안이며, 생각하고 몸이 기껏 움지기는 동선도 연신 그 안일 수밖에 없다. 자란 근대의 토양도, 식민지의 흔적도, 가족이나 사랑이나 연애나, 욕심이나 욕망이나 일이라는 것도 기껏 먹고 해치운 것이 애벌레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감금된 자유란 것도 더 적극적으로 몸을 키우는 작업이었을 뿐. 내몸의 각인, 생각의 상처, 끊임없이 자맥질만 하는 손발의 동선을 벗겨낼 수 있을까?
몸은 점점 딱딱해지고 한 차례 더뎌지고 굳어지는 몸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 훈육된 허물을 벗길 수 있을까? 벗을 수 있을까? 허물을 벗고 유약한 날개가 점점 펴져 날 수 있을까? 훈육된 울타리는 훈육된 각질은 점점 켜를 쌓는데, 그것도 시간의 함수로 덧칠을 하며 옭아죄는데 10년도 50년도 100년도 500년도... .... 시간의 켜는 말랑말랑해지고 겹쳐지지도 않으며 시공간을 점점 부푼풍선처럼 벌리고 있는데...시간이란 껍질도 겹쳐져 말랑말랑해지거나 유약해지지는 않는걸까?
시간이 녹아내리고, 그 유약해진 시간의 몸사이로 날개를 내밀어 시간의 각질을 벗겨내고 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