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녀석의 활동마무리 모임. 잠시 난 짬에 도서관에 잠깐 들르다. 아직 이른 시간 조금 기다려 책들과 마주서는데 선뜻 잡히질 않는다. 미술서적 보관대에 이것저것 만지작 거리다가 마땅치 않아 돌아서다. 몸은 설어 편치가 않고 그림이라도 보려고 갔는데 장날이라구 그림을 모조리 빼고 있어 관람할 수가 없다. 아마 월초부터 나름대로 독서이력을 정리하던 차에 덜컥 두려움이 스며든 모양이다. 읽히지 않고 읽으려 해도 마땅히 손길가는 것이 없다. 그렇게 배회하거나 한발 두발 물러서서 가방에 빌린 책한권만 둔 채, 다른 것들을 채워넣지 않고 싶다.
낮잠의 끝에 공상을 잇다. 뻔히 밤잠을 설칠 것을 알면서도 낮잠의 말미 뫼비우스 띠에 선다.
1.사람들이 뫼비우스 띠에 서있으면 어떨까? 이차원의 바닥에 붙어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덥썩오거나 가거나 그 다가섬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능력?이 오면 어떨까? 아마 아이들처럼 한번 하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 관점이 아니라 관계들이 그렇게 뫼비우스띠를 걷다보면 그렇게 시선을 넘어서는 불쑥 다가섬이 있다면 현실을 좀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을까? 그런 연습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그냥 치기라 폄하하지 말고, 불감의 빨간선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조금 서로 치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 뫼비우스 띠의 안팎을 넘어서는 저기 가을하늘이 눈이 부시게 시리다면, 마음의 안팎이 시큼할 정도로 파아란 물이 들 수 있다면 어떨까? 풀잎에 풀색이 스며들 듯. 마음들 사이로 그 파랑이 번질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일요일은 벌써 월요일의 그늘이 잠식한다. 편치 않다. 몸은 예민해지고 쉬어도 제대로 마음이 쉬질 못한다. 나잇살의 경계에 서서 마음도 머리도 몸에 밀려있는 이른 저녁. 조금 땀을 내준다. 하*동 작은 길로 들어서니 주말농장들에 몇몇, 아딜과 어울려 작은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들이 밝아보인다. 그늘이 촉촉해질 무렵, 많은 이들은 정오의 따가움을 피해 여기저기 움직임이 보기 좋다. 찬찬히 얕은 동산과 한적한 길들을 산책하다.
2. 내려오는 길. 시집 한권있으면 요기하려는데, 보통씨부터 제법 볼만한 책들이 눈썰미있게 포진해있다. 그대로 주고 사기엔 그렇구하여 셰익스피어 소설책 몇권을 가늠하다 [햄릿 hamlet]을 건네든다. 기억이 뭉글뭉글하여 그 느낌을 더듬어 본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다...[햄릿]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은 개인과 가족과 국가, 심지어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까지 의미를 생각해야할 정도로 포괄적이다. 그 이외에도 이 비극은 행동과 행동의 지연, 가짜와 진짜 광기, 허구와 실제, 이성과 열정 등의 상반되는 개념과 가치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의 사고와 행위의 본질을 끊임없이 묻고 있다...라고 번역자는 해설과 책 뒤표지에 이렇게 남겨 있다.
3. 어떤 이는 셰익스피어엔 고대인, 중세인, 기독교인, 근대인이 모두 담겨있다 한다. 위에서 내려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 거인의 숲에 스스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읽어낼 수 있을까? 숲으로 다가선다.
뱀발. - 참* . 마음만 바쁘다. 몸을 결빙시킨 채. 주중 일터일로 대*에 가지만 짬이 날런지. - 몸을 챙기지 않았더니 5-6년만에 환절기 목기침으로 애를 먹고 있다. - 일*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실적도 저조한데 마음이 쓰인다 쓸데없이. - 생각도 세세히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 명절연휴궁리만 깊어진다.
-주 1)-
- 불행한 근대사와 함께 찾아온 기억의 상실이 그랬듯이, 찾아올 기억의 회복 역시 혁명적인 난장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문화와 예술의 몫이 아니라 일상과 취향의 몫이 될 것이며, 일상과 취향의 혁명이 문화와 예술의 변화로 이어지는 한판의 반전이 전개될 것이다. 226쪽 이같은 일상과 취향의 혁명을 앞당길 견인차는 세련되고 전위적인 엘리트들의 예술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촌스럽고 뒤처지는 남녀노소 장삼이사들의 일상적인 감수성이다. 비록 오늘은 가짜 버버리무늬와 유사 베네통 색에 둘러싸인 색치의 일상에 갇혀 있을지라도... 227쪽
-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하기보다 아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142쪽
- 한이란 결국 흥으로 곰삭여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한에만 주목하는 담론은 청산되어야 한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한을 삭일 여유를 잃어버려 해학과 신명으로 승화시키지 못해 한의 늪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은 김치가 익어서 '시원하고 칼칼한' 발효맛을 내기 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정서에 늘상 붙잡혀 있었는데, 이 틈새를 일본의 신파가 밀고 들어온 것이다. 179-180쪽 요약
- 사람은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람은 시간에 대한 사유보다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 절실해한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렸다. 인간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미의식은 공간의식과 공간 취향에서 만들어지는데 돈가치와 효율성 주도에서는 이런 취향이 발붙일 곳이 없다. 어쩌면 삶터는 뿌리와 방향을 제공하는 삶의 기억들로 가득차있다. 186-187 요약
- 오늘의 우리는 어제 우리의 자리로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가는 중이다. 멀찍이 에둘러서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과의 경쟁'에 쫓겨 성찰의 자세를 내던진 지난 세기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191쪽
- 조화로운 톤과 개성적인 컬러가 없는 도시. 고유색의 부재란 한국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의 문제인데, 이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잡고 있다. 전통의 단절은 사실의 단절보다 전통 의식의 단절이 더욱 두려운 어둠을 빚는다. 저쪽에 내재하는 의미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와 감정의 기준을 볼 수 있다. 내재하는 의미란 다름 아닌 생활 철학과 생활 감정의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225-6쪽 요약
- 개성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란다. 동양화의 여백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232쪽
- 취향에 대한 담론은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하지만 이런 취향이 지닌 다원적인 모호성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지난 세기 이래 우리 안에 그늘을 드리운 이데올로기적인 사고 때문이다. 이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너머에 존재하는 이원론적인 사고 일반을 가리킨다....(중략) 앞뒤가 따로 없는 '뫼비우스의 띠'나 안팎이 따로 없는 '클라인 씨의 병'에 비유될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사고를 모색해야 한다...(중략) 성찰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근대 한국인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는 지점은 근대 한국인을 탄생시킨 근대성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낸'...235-6쪽 요약(취향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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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3) -
셰익스피어는 독특하게도 근대인, 고대인, 기독교인의 교차점에 서 있다. 그는 또한 종종 이교도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뒤섞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비판적이지 않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쉽게 저지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통합된,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재현을 보여주는 주제표현 방식이다. 셰익스피어의 입지는 그리스인의 호메로스의 입지, 로마인들엑 베르길리우스의 입지, 이탈리아인에게 단테의 입지, 에스파냐인들에게 세르반테스의 입지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시적 상상이라는 거울을 모든 자연과 역사에 비춘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우리를 초대한다. 그의 시선은 인간의 넓은 세계 전체에 뻗어있는 동시에 인간 감성의 가장 깊숙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는 '실재한 인생'의 이야기, 즉 역사적 인간으 생애가 신화적 이야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천재성은 인물묘사에 일차적으로 표현되는데 900명이나 되지만 각각 다른 인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이며, 각자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다. 45-46
베르길리우스(로마, BC70-19년)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호메로스의 모방물인 동시에 그것과 매우 다른 시도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시의 여인 무사가 노래하지만, [아이네이스]는 전쟁과 영웅을 내가 노래한다는 행으로 시작한다. "내"가 노래를 부른다. 아이네이스의 운명은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운명과 같은 종류가 아니다. '모든 유럽의 고전'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방식으로 전통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개인과 사회의 투쟁으로 삼은 것은 이것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40
근대인들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신에게 내쫓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 ..'자연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자연권'이 시민사회에서도 보장된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뻔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혁명적인 개념이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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