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수성의 혁명]: 시대로 인해 자신의 글이 빛났다고 한다. 전혀 다른 시대를 만났다면 이상한 개인주의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외삼촌과 형님부근의 감수성에 대한 궁금증은 묘하게 다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고, 나름 많이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이 책으로 인해 조각나 있던 인상들의 흐름들이 생긴다 싶다. 물론 나에 대한 부분도 그러하다. '한글세대'-소설,라디오,영화, 텔레비전,주간지,여성지의 등장과 대중이 생성되는 시기는 서울의 증폭과 맞물려있다. 250만에서 500만이 되는데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 끌어오르는 60년대의 시작은 이 젊은이들에게 김지하와 김수영과 김승옥이 겹친다. 김수영을 거꾸로 올라가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4.19와 김지하와 시대의 상황과 암울은 다른 경로를 걷게 만든다. 신경숙님을 매혹하게 만든 [무진기행], [1964년 10월...]의 단편들이 보고싶다. 그래서 아*** 도서관을 들러 [사상계] 원본을 보려한다. 좀더 색다르게 그 시대와 삼촌의 시대를 느껴보고 싶다. 바짝 건조하고 타들어가는 이념의 앙상한 뼈만 남은 80년대와 많이 다르다. 문사철이 그래도 대학생 10만 이하의 상아탑은 무엇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던 시대다. 꼼지락거리던 마음들과 고민을 만날 수 있다면 조금은 풍부해질 수도 있다는 어리석은 계산이기도 하다. 늘 고전을 강독하지 못한 존재로서 건조함과 부족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나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2.
성철스님의 백여일 강연록을 녹취 및 학문적 고증을 거쳐 수십년만에 완성한 책이라 한다. 강연을 하고 계신 무애거사님이 강연비를 털어 수강생들에게 배부한 책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피시에 온라인하기에 앞서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는 책이다. 일전 모대표님이 지적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인도를 거쳐온 장소와 시간을 버티어낸 내력의 스케일은 형언할 수 없을 조차이다. 서양학문의 건조증에 비하면 보고있는 광활하다. 이분법에 손쉽게 바래는 학문과 철학의 근거에 대면 삼분을 넘어선 광분이나 기껏 오감의 회복을 바라는 서양학문의 흐름에 비해 세밀하고 광활하다. 역사적맥락 아래서 읽는 것이나 따로 세세히 읽어내는 것이나 흐름을 잡기에 좋다. 진작 볼 수 있었다면 단편적인 조각으로 덜 헛갈려했을 것이다. 좀더 세세히 강독하기로 마음먹는다. 오늘 종강의 기운이나 단편적인 앎에 대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강연 말미를 참관하려 한다. 떨어져 있는 것이 아쉬움이 묻혀나는 것은 이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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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안의 나란 것은 파도에 비유할 수 있다. 나란 존재에 대해 그 외의 것을 세계, 신, 무의식이라는 표현된다. 하이데거의 세계안존재라 칭하는 것도 그러하다.
세상이 있다는 사람(상주론)은 순관을 갖고 12연기를 공부하고 없다는 사람은 역관으로 공부하여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혜를 본 사람을 견자, 도인이라고 한다. 파도치는 너와 나를 넘어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간다. 하지만 아직도 나란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소아와 대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에 잡혀있는 사람을 유심정이라 부른다.
하나의 대상에 몰입해서
[욕계(散, 어지럽고 갈등)-색계(定지, 안정-고요)-무색계(정지)]= 유심(있는 마음)
장소는 심리적인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성욕의 대상을 제한하여 성적인 콤플렉스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융이 학문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욕계에 비해 색계는 콤플렉스가 없고 정신과 의사가 없다.
내마음이 명경처럼 고요해서 진리가 그대로 비쳤지더라. 그것을 견이라 한다 - 세상이 고란 것을 보았더라. 이것은 장님이 눈을 조금 뜨는 것과 같다. 세상울타리를 박차고 나온다고 해서 견자, 도인이라고 한다.
심이연기, 고집멸도 131
고제에 4가지가 있다. 이 세상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은 공한 것이다. 나의 잘못된 착각에 의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고통스런 결과들은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의 뿌리를 갖고 있고, 이런 것들이 사실로 다가오는 존재감이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치를 따져보겠다. 이것을 따지게되면 집제를 마스터한 것이다. 멸제에서 색수상행식이란 기본적인 조건은 없는 것이다. 결국은 내 마음의 조작에 불과한 것이다. 묘하다라고 한다. 나의 존재적인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오묘하다라 한다. 묘라는 것은 아지랑이를 말한다. 있는 듯, 없는 듯 묘하게 피어난다. 아집과 악연으로 가득찬 세상이 있는 듯 없는 듯 묘하게 된다. 생로병사나 온갖 존재론적인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도제로 가게 되면 도제에도 공부해야한 순서가 있다.
도제에 들어가면 도인(길가는 사람), 멸제의 강을 넘은 사람을 성인이라한다. 도인이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해탈할 수 있다.
도과목을 공부하는 행자는 수다원 158쪽 아직도 일품의 수도도 끝내지 못했다. 견도. 수도
고집멸은 견도이고 도제는 修도. 길가는 것이 끝났다. 있는 마음의 끝을 넘어섰으므로 없는 마음자리에 들어서면 갈 필요가 없다. 무심의 자리이다.
도가에 머무는 사람은 일곱번을 왔다갔다하면 인연이 성숙해서 해탈한다. 여의 마음자리에 머무는 사람은 한번만 왔다갔다하면 인연이 닿아 해탈한다. 행은 색계에 머물러 해탈한다. 출은 아라한으로 공부가 끝난 것이다.
道 如 行 出
141 성인이 도로 나아가려면(종교마다 성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천주교의 성은 천당의 자리를 예약해놓은 것. 유교에서 배우지 않고도 아는 사람에 비해 불교에서는 나를 버릴 때로 버렸기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이탈한 것 된다. 중생에게 도움이 된다. 이것이 성이다.) 신심을 청정하게 해야한다. 이 행동의 틀에는 세가지가 있다. 세속의 욕구와 멀리하라. 항상 만족하라. 세상에 대한 욕구-대, 권세, 본능적인 욕구-, 소욕(생리적인 욕구)만 만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해라. 모든 중생의 착하지 않은 생각(탐진치살도음거짓말-발라맞추는말...)항상 즐거운 마음 만족하는 마음을 일으킨 다음 다섯가지 마음을 내어야 한다. ...십이연기로 관하고 지수풍화로 관해야 한다.
조도 - 길가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도공무화만 하더라도 선정의 또다른 즐거움이 나온다. 이러한 과정을 지키면 별상염주. 진리의 달이 비치도록 하면 마음을 챙겨라. 십이연기 고집멸도도 다 방편이다. 목적은 밥을 먹어서 배부르는 것이다. 교리가 복잡해지고 종단이 많아진다.
무명의 세상(캄캄한 세상)에서 작은 불빛을 보고 세상을 본 것을 깨쳤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판을 벌린다. 한국불교가 범부가 오백년을 지배해왔는데...그 (지혜의 횃불의 불꽃이 티어 밝힌다.) 길을 가기 위해 문밖을 나선다. 고제집을 벗어나 지혜의 횃불을 들고 멸제의 강을 건너. ...141 득/비득 얻고자하면 버려라
독각 - 연각 - 벽지불. 성문제자의 길(소리를 통해서만 이해를 잘한다.) 아미타불 극락의 세계는 빛으로 광견제자. 166
생각이 없는 번뇌-무의식으로도 검출이 되지 않는 번뇌. 삼천대천에 일불만 있고...여기서 대승이 나온다. 소승은 대승이 소승을 공격하기 위한 말이고 상좌라 한다. 대승은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하여 역사적인 인격성을 없앤다. 법화경과 화엄경이 대표적이다.
무잔죄, 유잔죄, 별주(의결권을 주지 않는다) 음행/도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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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제도 일터손님으로 인해 저녁을 함께 한다. 한 술하는지라 피곤하지만서도. 어려운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원칙과 친화력은 늘 대단하다. 너무 위계에 서열을 매기는 일상이 늘 원점으로 되돌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스쳐 지나간 해를 돌이켜보면 내려다보려는 오만으로 인해, 생동하거나 풍부함을 보지 못하고 알 수 없던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자주든다. 그래서 늘 배울 것은 한두가지가 아닌 듯 넓고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