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산 공원에서 만난 대전근대역사의 파편들 090704
나란 친구를 돌이켜보면 가끔 불쑥 낯선 나를 만난다. 머리의 언어만 대해 예민한 것 같지만 가슴과 몸의언어가 어색하게 섞여있지는 않을까? 가슴과 몸의 언어, 손과 발의 언어에 무척이나 둔감한데, 열정에 예민한 것은 아닐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늘 혼자있지 않거나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늘 혼자있는 것. 어디쯤 있을까? 가끔 그것이 모호하다. 현실은 각기 다른 언어에 예민하지 않다. 좋아하는 양식일 수도 있겠지만,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굳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던가? 가슴의 언어로 통하지 않으면 역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손과발의 언어로 교감되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겠지. 그런면에서 스스로 어디에 걸려있는지 난감하다. 그렇게 걸릴 수 있는 것인지도 말이다. 아마 머리중심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약간 가슴중심주의에 경도된... ...
1.
어찌어찌하다보면 그렇듯이 뒤풀이 자리를 말미까지 지키는 경우가 많다. 아마 거의 이십대를 맞으며 시작된 버릇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들이 썰물처럼 밀려가거나 밀물처럼 밀려들어올 때, 삶의 행간을 비추이다가 가끔 술에 이기지 못한 가슴의 말이 울려나오거나,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눈물이나, 아련한 추억들이 다가오고서고 하는 모습들이 재미있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말들이 그들 자신을 비집고 나오는 지점, 반짝거리는 마음들이 보이면,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서는 나란 놈들도 약간 봐주면서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가슴이나 손과 발, 마음의 언어구사능력이 늘었으면 하는데, 종종 머리에 얽매여 기동하지 않는 다른 언어가 박약한 스스로 밉기도 하다. 이 미련을 조금 가지고 가본다. 이 흔적의 말미까지 말이다.
십여년이 훨씬 지나 찾은 보문산은 남다르다. 신도심과 새로운 위락시설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곳은 철학원들과 보살들이 절반을 점유하고 있다. 빈한함과 어려움이 그렇게 버무려져 있다는 사실은 70-80년대 건물과 슬레이트지붕을 안고 서있는 붉은 깃발과 운명을 가름할 것 같은 붉은 글씨의 선명함에 녹록치 않는 삶의 고민들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졌을까? 일제시대의 건물의 흔적도 종종 배여있다. 아무도 눈길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2.
느낌을 살리기가 쉽지 않군요. 중동난 글을 잇는다는 것.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힌다는 일. 경계를 이쪽부터 저쪽까지 넓혀본다는 일. 그것이 머리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며, 손과발만의 영역만도 아니겠지. 어쩌면 제가 가진 언어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얕은 머리맡의 앎이 두렵기도 하다. 더구나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오로지 나의 편의적인 관점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미사여구를 대는 것도, 뼈아프게 남기는 것도 늘 더 풍부한 일상을 제대로 잡아낼 수 없고 편의적인 기억으로 남기때문에 조심스럽다. 각인된 근대를 넘어서야하는 당위, 이런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해야한다는 사명감도 없는데, 엉거주춤한 자세가 문제를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변두리 느낌을 남기는 것으로 대신해야할 것 같다. 선생님의 발굴한 역사와 노고에 감사. 행운을 함께하고 나눈 분들에게도 감사. 반나절 답사가 가져온 주저하고 있는 머리속 앎도 이 보문산 자락에 붙어있는 현실의 흔적과 삶의 소리는 손과 발부터 시작하여 가슴을 울리기도 하고, 마음 속으로 일그러진 근대와 , 속속들이 들러붙어 있는 삶의 흔적들을 흔들지만 불안한 흔들림이 아니라 그래도 행복한 흔들림을 얻었다고 소회를 붙이며 땜방 몇조각.
3.
가끔 아니 드물게 사람을 만나다보면 얼굴보다 이름이 익숙한 경우가 있다. 이름이 회자 되어 그 이름이 또렷하지만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경우가 생기는데, 소나기를 가르며 돌아온 길. 대면한 뒤 수인사가 처음이라 이름을 먼저 전하니, "아~ ~" 하신다. 그리고 명함을 건네받으니 "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회지 책소개를 번갈아 했는데 정작 얼굴을 몰랐던 셈. 관심이 깊고, 책까지 준비하고 있다한다. 이렇게 내공 깊은 분들이 산재하고 있다니, 관심외한인 나와 달리 역사에 대한 관심의 깊이와 일상에 침윤된 깊이가 놀랍다.
4.
보문산 전망대를 내려오는 길. 멀리 검은 먹구름을 의심하긴 하였지만, 갑자기 장대비로 변한 소나기 처럼, 하얀 햇살과 막걸리에 대한 유혹이 걸음을 재촉하였지만 온몸으로 맛는 소나기 같은 보문산 공원에서 만난 근대역사의 편린들은, 바쁜 핑계로 밀어낸 예상과 달리, 온몸으로 맞는 소나기같다. 그 소나기에서 낭만을 찾아낼런지, 신열을 앓게될지, 두고두고 상기되는 아름다운 추억, 아픈 추억으로 가는 길목이 될는지 모르지만 판단은 유보한 채로 온몸으로 기억하기로 한다. - 고스란히 남아있는 좌우익의 톱?질(형무소의 비극, 산내, 임시수도 20일의 대전), 끊임없이 문화재를 받아내야하는 비극. 일제시대의 풍경들. 해방의 기억들.
5.
그리고 뒤풀이. 풍경은 정지한 듯. 파도소리 은은한 바닷가의 엠티 분위기다. 순한 억지를 부린 듯, 술도 노래도 일순배하는 도시 속의 풍경은 도시같지 않다. 은은한 기타소리와 노래 소리. 그리고 번지는 웃음과 미소. 19살 등푸른 학생의 노래소리와 이야기. 청춘의 기억이 섞인다. 선생님과 학생의 위계도, 나이를 잣대로 하는 금기도 없고, 욕심을 드러낼 수 없는 한자리의 시공간도 정지한채로 둔다. 경험의 공유가 몸의 흔적에 대한 공유의 장면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따듯하게 안고 가보기로 한다. 머리의 기억으로 흡인하지도 않은 채, 희석하지 않은채, 온전히 몸의 기억으로 가져가기로 한다.
뱀발. ...
근대를 산책하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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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토) 비오다 개다 비오다 개다 (근대를 산책하다 4탄 모임)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시가 개발되면서 대전 각지에 있던 처치곤란 근대의 유물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온다. 한때 젊음의 영광을 뒤로한 채 추억이란 이름으로 운행 정지한 녹슨 케이블카, 이제는 풀만 자라는 풀장과 놀이기구는 없고 바닥을 드러낸 그린랜드. 더 이상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꿈동산에 소일거리로 산책하는 노인들. 어쩌다 한번 생각나는 보리밥에 막걸리.
하나 둘, 시대의 고물들이 모인다. 대전의 살아있는 근대사 박물관일까. 아직 고물이 되긴 영 이르지만 고물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패턴을 익혀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젊은이의 권리이자 의무다.
14:30 대사동별당 앞




집결 시간은 오후 두 시지만 역시나 코리안 타임이라고 두시 반 쯤 되어야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인다. 장소는 난생처음 가보는 대사동 별당 앞이다. 회비는 만원, 준비물은 가벼운 몸과 마음이다.
공주 갑부 김갑순의 별장으로 지어졌다는 대사동 별당. 이후 한국전쟁 20일간 대전에 마련된 임시정부 시절 부통령 이시영의 집무실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증이 없단다. 나중에 식당으로도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영락없이 흉가로만 보인다. 여기저기 깨진 유리창하며 낡은 기와와 정원이었을 법한 마당에 나 있는 무성한 풀들. 예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복원해 보려 하나 쉽지 않다. 이곳은 대전시 중구에서 안전상 재난위험 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재난위험 시설이라니. 근대유물을 대하는 시의 태도가 극적으로 나타나는 대목같다.
15:00 케이블카

대학을 대전으로 오기 전 대전에 대한 나의 기억은 꿈돌이 공원 자기부상열차. 보문산은 물론이고 보문산의 명물이었던 케이블카를 처음 보는 건 당연지사. 이제는 운행을 멈췄다는데 추억이 머무는 곳이라는 글자가 어찌 좀 쓸쓸하다. 멈춘 케이블카를 타고 보문산 한바퀴 돌면 상쾌하고 좋을 것 같다.
15:20 동굴을 갈 뻔 했으나.

평일에 개방한다는 보문산 동굴. 아쉽게도 공무원은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 공무원이 일을 하지 않으니 철조망을 열어줄 사람도 없다. 닫힌 철조망 앞에서 동굴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야 했을 뿐. 여기에 동굴을 개조해 지하벙커를 만들었다는데 일설에 의하면(뻥이 가미되었음을 고려) 대전시민이 다 들어갈 정도로 크단다.
충남도가 군사안보용 ‘충무시설’로 동굴을 이용한 까닭에 일반인에게 출입금지가 되었으나 지난해 말 중구가 구입하면서 개방했다. 관광코스의 하나로 영화상영관이나 북카페 찜질방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린랜드도 수영장도 다 고물이 된 판에 어찌될는지. 습도도 높다는데.
15:40 6.25전쟁 대전지구 승리기념탑



계단에 걸터앉아 최장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뒤에서 흘러나오는 간식들을 먹으면서(간식 감사했어효!) 죽고 사는 전쟁의 이야기가 한편의 블랙코미디처럼 와 닿는다. 인민군이 죽이고 미군이 죽이고 스펙터클한 학살의 이야기가 몇 십년 전에 버젓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이런 평화로운 숲속에서 듣다니.
6.25전쟁이 일어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아무도 모르게 짐을 싸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까지 간 이승만 ‘너무 많이 왔나 싶어’ 다시 수원으로 가려다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대전에 정착한다. 이승만이 강행군을 벌이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국민들 안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왔다.
6월 28일 서울이 무너지고 20일 동안 대전은 임시 수도였다. 7월 14일 피난령이 내려지고 미군 24사단장 딘 소딘은 미군 지원병이 오기 까지 시간을 끌어주는 임무를 맡는다. 결국 방어전투는 실패하고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다. 미군 지원군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확보한 공로를 인정받아 나중 포로 교환을 하며 본국으로 돌아간 딘 소장은 대통령급의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대전방어에 많은 희생이 따랐던 24사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대전에 세운 전승비가 바로 이 대전지구 전승비이다. 이곳 보문산 공원에는 1975년에 옮겨왔단다.


16:20 보문사



일제시대에 보문사는 대전 일본인 유지들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별장이라, 별장인데 왜 이렇게 작고 초라한가. 별장의 ‘간지’가 아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일까. ‘별장’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지나치게 부풀어진 탓일까.
최장문 선생님의 해설에는 어린시절 뛰놀았던 보문산에 다시 돌아온 일본인 할머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후지추 간장공장의 딸이었던 할머니, 여든의 나이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일본인이라... 당시에 어린애인줄 알면서도 어딘지 서걱거리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달리보면 모두 제국주의 시스템 안에서 삶을 꾸려나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 더군다나 추억을 되씹고 과거를 회상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어린시절을 찾아온 할머니의 삶이 쨘하다. 모두 세월이 흐른 탓인지..
17:00 을유년팔월십오일기념 해방비



해방 이후 대전 사람들은 대전역 광장에 기념비를 세웠다. 흥분이 가라앉은 일년 후 8월 15일의 일이었다. 당시 기념비가 가진 의미는 꽤 컸으리라. 6.25전쟁 중 폭격으로 인해 일부 손상되었다 다시 광장에 세워졌는데 71년에 이곳 보문산으로 옮겨왔다.
들어가는 입구가 나무들이 둘러싸여 있는 탓인지 어둠침침 축축해 보인다. 모기들도 윙윙대고. 해방비를 설명해주는 선생님의 옆에서 여자분들은 팔다리를 긁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나도 역시 모기 덕분에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
보문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알까. 모기가 윙윙대는 어둑침침한 보문산 구석에 해방비가 서 있다는 사실을. 숨바꼭질도 아니고.
17:40 전망대




십분쯤 더 걸으니 보문산 전망대가 보인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전망대라니. 얼마나 보일까 싶었는데 역시 전망대는 전망대인지라 시야가 확 트인다. 한밭종합체육관에서 열리는 야구경기가 한창이다. 아이들의 애국가 소리, 관중들의 환호소리가 여기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전망대에서 대전을 내려보니 저 넘어서 산내, 저기는 동구, 대전역, 저기는 중앙로, 나무로 가려진 곳은 서구, 저쪽은 유성. 대전의 모습이 눈에 잡힌다. 야경은 더 좋겠다, 얘기하니 들려오는 대답. 보문산이 성폭행 1위 발생지역이라며 혼자서는 절대 밤늦게는 금물이란다. ;
18:40 보리밥집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러 내려오는 길. 실비가 오는 것 같더니 점점 빗줄기가 굵어져 폭우가 쏟아진다. 다행히 우산을 빌려썼는데 막상 우산을 빌려준 친구는 홀딱 젖었다.(고마웠어요^^;)
막걸리에 도토리묵, 해물파전, 동치미국수 한 상. 생각만 해도 그림이지 않나? ㅎ
21:00 비돌

2차는 비돌에서 통기타 반주에 맞춘 추억의 노래를 안주삼아 맥주와 데낄라. 과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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