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의 책 뒷표지에 적힌 말이 인상깊어 찾아보는데 책소개글들에 없다.  농사라는 것도, 사람의 의도가 가미되기 이전의 수렵이나 야생의 황량한 들로부터 보아야 한다. 저 광활한 들엔 의도와 상관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곡식이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야초도 쑥쑥, 이것 저것 자로 잰다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 횡행한다. 야생의 들에서 인간의 의도가 가미된, 도덕과 윤리는,  농토처럼 농사짓기 시작한 이후의 사람의 족적일뿐, 그 이전의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다음에 윤색된 일이다. 이런 취지의 소개글은 신화의 넓고 깊고도 오묘한 공존의 모티브를 다시 보게 만든다. 

도덕과 윤리에 친숙?한, 실제로 그러하지 않으면서 그런 채 하도록 길들여진 지금은 어떨까 싶다. 그 매듭이 갖는 엄청난 정보량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하는 것인지? 상상력을 빗나가는 신들의 숨결이 조금은 지금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을까? 잠깐잠깐 보다나니, 진보라고 자칭하는 분, 타칭하는 분들이 어쩌면 그들의 인문이 도덕과 윤리에 과도하게 집중해서 스스로 동선이나 현실을 보는 눈이 편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나 해석을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짐에도 늘 보는 잣대가 제한된 것은 아닐까? 스스로 옷을 입어 제 주변의 변화와 현실에 둔감한 것은 아닐까? 강박처럼 그러해야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벗어나지만 너무 몸에 착근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래서 질곡같은 현실을 타넘거나 타넘은 경험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늘 바라보는 시선만으로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제한된 시선이 늘 제몸을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로가 아니라, 스스로 도덕적, 윤리적 당위성이 있다는 우쭐함까지 섞여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도덕적 윤리적 머리진보에 대한 강박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현실의 아이러니를 넘는 일은 그렇게 시선을 만들기전 마음의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아닐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깝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야 현실을 보는 눈이 지금보다 낫게 생기는 것은 아닐까? 점점 나이에 생활환경에 같은 부류의 사람이 섞임에 따라서 그 가속도에 비례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불감에 대한 경고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슬금슬금 생각이 안절부절이다.  현실의 경계를 보는 눈은 늘 갇힌다. 인과에 익숙하기도 하고 당연한 것에 익숙한 것이 사람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 안목을 늘 벗어난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경계를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넓게 넓게 그 극한의 양쪽을 고려해야 한다.

뱀발. 몸이 천근이어서 책을 보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가벼운 영화들을 본다는 것이 이것저것 중동잘린 단편들을 이어서 본다. 대전 인디영화 제목들과 소개팜플렛을 훑어본다. 이번주, 담주 월요일까지이지 아마. 보고싶은 영화도 많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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