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님이 한국에서 2년 체류하면서, 책자의 마지막장 제목을 이렇게 달고 있다. 절망스러울 정도로 답답한 일본 사회를 구원해줄 희망을 갖고 왔지만,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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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라케시대 - 일본은 70년대 먹고살만해지면서 사회 변혁의 분위기는 무너지고 시라케(퇴색하는 빛바랜) 세대가 나왔다. 60년대 세대는 자신의 아랫세대에게 너희는 시라케 세대라고 했다. 아랫세대는 윗세대의 이중성, 자기기만성을 참을 수 없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자기 정당화를 잘하는 그런 세대라는 것이다. 자기 위로를 하며 그냥 조그마한 서사에 갇혀 있으면서 사생활적인 즐거움으로 살자는 분위기다. 이것은 훌륭하고 영웅적이며 아름다운 삶과는 다른 것이다. 시라케세대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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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라케 수사로 "아, 저는 약간 힘이 없어요" "우리는 힘이 없어요" "너무 정의로운 얘기는 제가 못따라가요" "나는 맨날 먹고살기 힘들어서, 바빠서 그런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라는 식으로 회피한다. 지식인조차도 그렇다.
3.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의'라는 말을 하기가 쑥쓰러워지는 분위기로 되어간다는 점에서 30여년전 일본의 전철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밟고 있다. 한국 사회가 희망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일본 사회만을 닮지 않았으며 하는데... ...
4. "아, 저는 지식인이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월급쟁이지요" 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이 급속이 많아질거예요.
뱀발.
1. 일본을 닮아간다는 이야기. 일상적 파시즘의 우려들이 회자되지 시작한지가 이삼년쯤 되는 것 같다. 좀더 구체화되면 좋을텐데. 부족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작년 이명박 정권 1주년쯤 대담한 내용인데, 정치적 냉소주의에 시선이 간다. 스스로도 그러하며,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마저 손을 놓고 있는 듯한 상황은 무서운 속도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속력이 빨라지는 지점은 현실을 너무도 확연히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고비가 그 지점일 수도 있고 거기에서 갈라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냉소와 무기력증이 스며들지 않게, 작은 마음들, 행동들을 더 챙겨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생활인들은 더 더구나 그러하므로 큰꿈 큰서사를 뿌리내릴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아픔도 슬픔도 섞어 방법을 찾아내야하는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무기력을 핑계로 매체마저 관심을 끝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다른 버전이 몸이 생각이 바지런을 떨어야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파시즘을 이야기하거나 예견하면서도 양손에, 생각의 무기를 무장해제하는 일은 더 더구나...더 예민해져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현안과 현실에 대해 더 더욱 궁리를 하고 파고 들어야 하지 않나싶다. 무기력을 경계하는, 경고하는 님의 말처럼....

2. 우리가 언제 엠비를 보고 그것에 맞춰 살거나 싸우거나 한 것이 아니라 겨우존재하는 열외자의 삶으로 살고 고민하고 고뇌한 것이 아닌가?
3. 엠비의 시선에 우리 고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시선에 고민을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엠비를 보고 넋놓는 일과 이웃을 보고 넋놓는 일과 다를 것이 별반 없는 것은 아닐까? 고민과 동선을 냉동시키는 일은 아닐까? 사고를 판단정지시키는 일은 아닌가? 그런면에서 시대의 우울은 생각의 경계에 서있는 [너-나]에게 책임지우는 일이 많은 것은 아닐까?
4. 고민을 밀고나가는 일, 생각이 멈춰버린 지점. 다시 봐야하지 않을까? 나는 왜 모든 것을 무장해제시키ㄲ 생각있는 사람들이 고민을 멈춰버렷으므로 이중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고민을 차치하고 일상으로 들어갈 명분을 얻을 수 있고, 서로서로 큰서사는 흘러가는대로 더 놔둘 것이고... .......어쩌면 고민을 증폭시켜야, 삶과 생활의 결을 더 단단히 넓혀야 하는 시대의 몫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5. 빠르게빠르게 좁은 보를 지나가는 물살에 그저 떠내려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면......그러지 않았으므로 남탓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했으므로 지금이 방종의 시기로 기억될는지도 모른다. 우울을 가장한 무기력의 시점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생각있는 사람들이 함께 생각을 멈추었으므로.... ...잔인한 여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운들 차렸으면 블로거 논쟁이라고 분분하면 좋겠다. 엠비가 대신 내삶을 너-나의 삶을 살아주는 것ㄷ 아닌데 너무 기운 없고, 기운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왜 이리 남의 시선에 민감한 것이 생각있는 사람들이었던가...?? 왜 고민의 지점이 늘 '그'였을까? 고민의 지점이 너나 나나 너-나로 넘어오면 문제라도 생기는 것일까?
6. 큰서사도 작은서사 일상과 큰 공간을 병립시키려는 노력은 걸쇠라도 걸린 것일까? 큰서사에 늘 나의 생각을 담보잡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큰서사와 작은서사를 관통시키는 방법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은 있던가?
7.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우리에게 가능한가? 묻고있는 저자처럼, 지금의 고통과 함께하는 기억의 출구는 연대를 만들 수 있을까? 파시즘의 방어선을 칠 수 있을까? 최소한의 물음이라도 공유할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의 연대는 가능한가? 고민의 연대는 가능한가? 삶의 연대는 가능할 수 있을까? 있을까?
8. 시대가 시대를 닮아가고 사람이 사람을 닮아가고 마음이 마음을 닮아가고, 사고의 휴전선을 뛰쳐나가고 생각의 휴전선도 뛰쳐나가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 할 수 없다는 것도 별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 정권과 맞짱을 떠야한다는 생각이 늘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일대일 대결에 너무 친숙한 것은 아닐까? 우리 생각은 힘이 너무 세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모으로 모으고 함박눈처럼 뭉쳐야 단단해지고 밀가루처럼 물도 묻혀야 말랑말랑 반죽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우리 생각은 늘 통째로 해결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은 아닐까? 힘이 그만큼이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