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네이버 하람)
보리물결
난 보리밭을 지나면서 취한 척만 했을 뿐이다
보리밭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침 거길 지나가는 들병이의 손목을 잡았음만은 시인한다
보리밭에 들어가지 않았다
보리밭에서 종다리가 날아올랐는지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종다리가 분홍 목젖이 보이도록 저렇게 공중에서 재잘대는 것은
그건 종다리가 노래하는 것이다
나는 보리밭 한가운데를 저토록 깔고 뭉개지 않았다
거기서 뒹굴지도 숨결이 거칠어지지도 숨을 포개지도 들썩거리지도
구름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보리밭에 들어가지 않았다 허나
오늘은 보리 까끌까끌 익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거니와
나 이번엔 진짜로 취해봐야겠다
신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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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사내
격정과 결의, 사이에서
사내는 울음을 참고 있다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넘어오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울음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이
밑바닥에서부터 끓기 시작한 격정이
사내의 몸속을 휘돌아다니다
사내의 애를 끓이고 있다
이제 곧 전화를 끊고,
사내는 애가 탈 것이다
얻어맞은 팽이처럼
압력밥솥의 꼭지처럼
부르르 떨 것이다
그때까지는 저렇게 뜸을 들이고 있을 거다
울음이,
익혀둔 울음이
희디흰 쌀밥처럼 부풀어 오를 때까지
뿔
터미널 앞 가정식 백반집 벽거울에
지금, 제 늦은 저녁을 반추하고 있는 사내
습관적인 자책의 얼굴로
건너편의 제나를 씹고 있다
빈볼의 유혹을 참기 위해
질겅질겅 껌을 씹는 8회 말의 투수처럼
애궂은 마운드를 다지고 다지는 것처럼
초식의 식능이란
흔들리는 내면을 수없이 되씹고 다지는 것
뿔은 그렇게 피어난다
날카로운 풀,
씹히고 씹힌 내면이
저도 모르게 밀어올린 풀
한 치의 뿔이
한 들판의 풀인 것처럼
한 구릉의 풀을 씹고
터미널의 사내는 또 다른 구릉의 저편으로 이동하고 있다
장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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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차편으로 이동하면서 남도의 보리밭을 정신없이 보았다. 시립미술관의 신오감도 한편 보리밭의 직선과 직선무리의 곡선이 바람결에 실리는 모습은 숨이 막힐 듯하다. 보리밭 사이를 일렁이는 바람의 결과 변주는 잊혀지기 어렵다. 사진하나 구해와야겠다.
2. 초식동물의 뿔, 풀. 그걸 먹고자라는 우리들의 상흔엔 벌써 뿔이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메이데이와 촛불 2주년이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