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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된 자본-기계와 강고해진(그러나 또한 희극적인 퇴물이 된) 국가장치가 지배하는 사회는 딱딱하지만 명료한 통제사회가 아니라 부드럽지만 불투명한 관리사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투명한’이란 지배체제가 흐트러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추상적이고 복잡해졌음을 뜻한다. 관리사회는 억압하는 사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유를 관리하는 사회이다. 사회는 유체화되었고 지배체제의 전략은 통제에서 관리로 옮겨 갔다. 이런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이 사회의 방향성은 어떻게 수립되어야 하는가? 이런 사회에서의 실천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 문제를 붙들고서 씨름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핵심적인 출발점은 ‘생성’을 사유하는 데 있다. 이 시대의 에티카는 이런 생성을 전제하고서 성립한다. 이 저작에서 다룬 것은 이런 생성의 윤리학, 더 구체적으로는 ‘되기’의 윤리학이다. 에티카의 측면에서 『천의 고원』을 읽어냄으로써 이 시대를 위한 사유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소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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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반납기한을 하루 넘겨 에돌아 반납하다. 도시의 틈새,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건물들을 지나고 버스를 타고, 언덕에 지식의 위용을 부리고 있는 듯한 도서관으로 들어서다. 빼곡이 들어선 신간도서에 눈길이 가 한참을 들여다보다. 몇주전과 그대로이지만, 간간이 섞여있는 시집들이 봄의 색같다. 그러다가 [천하나의 고원]을 집어든다. 들뢰즈/가타리,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낯설기만한 유행처럼 현란하기만한 활자들을 생성한, 겉맛만 돌아다니는 현실 속에, 철학자 이정우의 사유는 얼마나 깊을까?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일까? 집어든 책에 빨려든다. 후기부터 거꾸로 보다. 부제가 소수자의 윤리학을 위하여이다. 다 정리하고 하고싶은 이야기가 말미 가지런히 놓여있다.
생성과 존재가 층위가 다른 것처럼 편취해가는 현실을 보고, 그릇된 해석에 그것을 같은 층위에 점선으로 섞어놓는다. 그리고 [ ]이기가 아니라 [ ]되기의 읽기는 실선과 점선처럼 날카롭다. 끊임없이 따라붙는 이분법의 질곡을 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듯 모를 듯, 모를 듯 알듯 이어나간다. 달팽이처럼 기어서 넘는, 현실을 넘는, 사회운동의 뿌리깊은 문제도 그 안에 담겨있다. 그리고 시집과 책들앞에 서다가 그림들을 보다가 일어서다. 도시의 불빛은 완연하고, 불빛에 바랜 목련은 차마 눈을 건네기가 아쉽다.
도서관 정문을 나서는 길. 책의 말미가 복받쳐 올라오고 뭉클거린다. 사람들 생각이나 마음은 다 한결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넘거나 감싸안아 넘는 길의 험함도 그려려니와 마음의 렌즈에 모아지는 시선들이 친구의 가슴처럼 따듯하다 싶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집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딱딱하고 낯선 책을 보고 뜨거워지다니 이해할까? 때로 건조하기만 한 책들을 보다가 나면 그럴 때도 있는 것을 어떡하랴.
박재동화백의 그리스 여행 1,2부(올림포스산)도, [권력의 병리학], 고통의 이해도 함께 섞는다.
blog.naver.com/pkies/11004390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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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30 마음이라는 것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일까? 저기 한점, 한방울이 모이다가 햇살이 증발해버리기도 하지만, 요기 한점과 보태어 서서히 결이라도 생기는 것일까? 작은 작은 변화. 작은 작은 흐름. 미동하지 않는 것.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
일터를 핑계대면서 정작 아는 것은 무엇일까? 정작 느끼고 있는 것도 아파하는 것도 하나없이, 그저 집-일터-[ ]의 삼각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군상들로 폄하하지는 않았던 것일까? 불감의 끝을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불감증이라고 회색톤으로 말하기에 앞서 뇌수 깊숙히 골수에 사무쳐있는 지금의 무통증으로 돌려야하는 것은 아닌가?
오미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시선만 되풀이 반복되는 앎에 그치는 것은 왜일까? 혈연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혈연을 알고, 그 연결을 느끼고, 가끔 그 아픔에 움찔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면 오히려 그 가족사와 혈연을 더 궁금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쿨함이 외려 다른 사람들에겐 무관심의 핫함으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닌가?
일터를 한바퀴 산책하다가 든, 집안사에 대한, 일터 연결망에서 대체 앎의 깊이에 대해 궁금하기나 했던 것인가? 공적-사적인 경계를 선명하게 나누고자 함과 그 섞임을 오히려 낫게 발전시킨 적은 있는가? 합리성이라는 빌미로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맛보고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모둠하는 것에 대해 보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눈을 감았거나 보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꽃이란 것이 결이 있을까? 다 제 각각 피는 것인지? 제 각각 피더라도 나침반처럼 그곳을 향해 결이 나있는 것은 아닐까? 꽃의 결에 대해 가슴은 마음은 미동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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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